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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2-01-28 20:08 (금)
152. 부활(1899 )-신이 된 인간 네흘류도프와 카슈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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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부활(1899 )-신이 된 인간 네흘류도프와 카슈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1.12.29 09: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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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변할 수 있나.

선을 믿는 사람은 그렇다고 말한다. 아니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타고난 천성은 바꿀 수 없다는 말은 동서고금을 통해 진리로 통하기 때문이라는 것.

‘천성불개’라는 말을 떠올려 보라고 한다. 어떤 계기로 인해 잠시 착하게 변할 수는 있어도 결국은 악한 본성인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사람의 성격은 결코 변할 수 없다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

그러나 간혹 그 진리는 극소수의 사람에 의해 뒤집히기도 한다. 네흘류도프가 여기에 속한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변하고 그러려고 몸부림 친다.

톨스토이는 <부활>의 주인공 네흘류도프를 통해 인간의 선함을 믿고 있다. 그 선함이 인간 본성을 바꿀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너무 유명해 다 아는 이야기지만 지면을 채워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내용을 잠깐 살펴보자.

네흘류도프는 공작이다. 지위가 높다는 말이다. 돈도 많다. 대대로 엄청난 규모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다.

그가 만나는 사람은 장관이나 장군이나 법조계 최고위층이고 그들과 만나 대화를 공유할 지적 수준을 갖고 있다.

그가 부리는 하인도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일가친척 역시 그런 부류에 속한다. 속된 말로 권력과 돈을 양손에 쥐고 있으니 네흘류도프는 대놓고 연쇄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한 법을 신경 쓸 필요 없다.

더구나 때는 제정 러시아 시대로 그런 무기를 가진 자를 최고로 우대하는 분위기다. 나라에 황제가 있다면 그가 사는 지방의 왕은 좀 과장되게 표현하면 네흘류도프가 되겠다.

이에 반해 카츄샤는 초라하다.( 김부자 버전의 ‘카츄샤의 노래’를 듣고 싶다. 쓰다 말고 웬 오두방정이냐고 핀잔 주기 전에,독자들도 읽기 전에 이 노래 한 번 듣고 시작해 보자. 분위기가 아주 묘하게 흘러 갑자기 착한 사람이 되어 가는 자신을 느끼게 될지 어찌 알겠는가. 노래 한 소절로 이렇게 변하기도 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니 사람은 변하는 것이 맞기도 할 것이다. )

카츄샤의 출신은 불가촉천민은 아니라도 그와 비슷하다. 그런 하류 인생이 살만한 세상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다행이라면 다른 누구의 집도 아닌 바로 네흘류도프 집의 하녀라는 것. ( 김기영 감독의 ‘하녀’는 대단한 영화다. 그러니 시간 나면 찾아볼 것을 권한다. 내용은 이 책과는 전혀 연관이 없다. 단지 하녀가 나온다는 것만 같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둘은 주인과 종의 관계이니 좀처럼 엮이기 어려운 존재다.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젊다는 것.

힘이 넘치는 귀족 네흘류도프가 보기에 하녀 카츄샤는 예쁘다. 그래서 그는 그녀와 하룻밤 뜨거운 관계를 가졌다. 둘은 잠깐 사랑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럴 수는 없다. 네흘류도프는 백루블을 던져 주듯 카츄샤에 쥐어 주고 군대에 갔다. 카슈샤도 미련이야 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신분상의 차이를 받아들인다.

천한 자신이 귀한 도련님을 한 번이라도 사랑한 것만도 감지덕지하다. 어느 날 바람이 불었고 공작이 스쳐 지나갔을 뿐이라고.

장교 생활을 하면서 네흘류도프는 급속히 변했다. 카슈샤와 만날 때만 해도 정의니 불의니 부자니 가난한 자니를 고심했던 젊은 대학생은 이제 본격적인 타락의 길로 젊어 들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술을 먹었고 향락에 취했으며 삶의 행복은 오로지 거기에만 있다고 믿었다. 그러기에 귀족의 신분과 돈은 넘쳐났다.

그러다가 어떤 사건의 배심원으로 네흘류도프는 참석한다. 거기서 그는 카츄샤를 다시 만났다. 살인죄를 쓰고 있던 카츄샤를 보고 네흘류도프는 엄청난 심적 동요를 겪는다.

하룻밤 사랑했던 그녀.

천성이 선했던 그는 창피함, 모든 굴욕을 뒤집어쓰더라도 악의 길에서 선의 길로 접어들기로 작정했다.

자신이 일회용 컵처럼 쓰고 버렸던 카츄샤를 위해 이 한 몸 초개와 같이 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녀의 석방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녀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고 따라서 무죄를 확신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공작의 신분도 돈도 영지도 그 모든 세속의 화려함을 버렸다.

▲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참회의 길을 걸었고 카츄샤 역시 반성과 거듭된 깨달음을 통해 부활에 성공했다.
▲ 네흘류도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참회의 길을 걸었고 카츄샤 역시 반성과 거듭된 깨달음을 통해 부활에 성공했다.

여기서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녀를 모른 척하는 게 맞다. 괜히 알아서 자신의 체면만 구길 필요가 없다. 더구나 카츄샤는 자신이 떠난 후 창녀의 길로 깊숙이 걸어 들어가지 않았던가.

그 기간이 무려 7년 정도이니 네흘류도프는 모자를 깊숙이 눌러 쓰고 하던 일이 급하다는 핑계로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뿐이다. 그러나 네흘류도프는 그러지 않았다.

무엇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카츄샤를 위해 몸을 던지기로 했는지 그것을 양심이니 죄의식이니 하는 것으로 간단히 결론내리기는 어렵다. ( 상, 하 두 권으로 된 장편소설인 점을 감안해 달라.)

그녀의 운명 전체에 그는 자신이 있음을 알았다. 죄는 자신이 지었는데 벌은 카슈샤가 받고 있다.

이런 생각이 든다면 네흘류도프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득도를 통한 신의 경지에 들어갔다고 봐야 한다. 무언가가 이루어지는 순간, 깨달음의 순간은 얼마나 장엄한가.

그가 힘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카츄샤는 유형수가 되어 시베리아로 형을 살러 떠나야 하는 운명이다. 그 길고 험난한 여정을 네흘류도프가 따라간다.

따라가면서 그는 죄수를 다루는 자들의 무자비함과 잔혹함에 치를 떤다. ( 상류층들은 민중을 타락한 존재로 보고 엄히 다스려야 한다고 여긴다. 자신들이 정한 질서를 위해 감시를 한시도 늦출 수 없다는 것이다.)

원로원도 그 어떤 법관도 일개 창녀의 살인 행위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그렇다 쳐도 무수한 시민들이 이유도 없이 감옥에 갇히고 처참하게 족쇄를 차고 거리에서 죽어가는 현실은 참혹하다.

네흘류도프는 생각한다. 검사와 배심원단과 원로원과 재판장과 간수들이 타고난 악마들인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뿐이다.

지시에 따라 일을 하는데 그들의 죄를 물을 수는 없다. 그들은 공무를 수행할 따름이다. 여기서 가스실로 내몬 나치 일당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수많은 유대인을 죽음의 길로 보낸 그들은 일이 끝나면 퇴근해서 따뜻한 가족들 품에 안기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 이전에 제정 러시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 물론 그곳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지금은 안 그런가.)

국가가 시킨 일을 충실히 하는 보통의 사람들, 기분에 따라 구금하고 귀부인의 요구로 석방하는 그들은 지금도 넘쳐나고 있지 않은가. 책임은, 심부름하는 그들이 아닌 오로지 국가의 몫인가.

잠시 곁가지로 샜다. 마저 이야기를 해보자. 네흘류도프는 카츄샤 석방의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자 최후의 수단인 황제의 탄원에 목숨을 건다.

돈을 뿌리고 공작의 지위와 친척의 위세를 이용해 탄원서는 무사히 황제에게 전달되고 그녀는 석방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석방되지 않아도 카츄샤와 결혼하기로 했던 네흘류도프는 그녀가 석방됐는데도 결혼할 수 없다.

그의 변심 때문이 아니라 그녀 때문이다. 정치범과 섞여 있던 그녀는 이동 중에 정신적 깨달음을 얻었다. 자신의 현재 위치와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이런 저런 의식을 심어준 남자가 평생 배필이다.

네흘류도프의 진심을 의심해서가 아니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도 아니다. 진심을 알고 그 어느 때보다도 그를 사랑하지만 카츄샤는 자신의 길을 간다.

과연 여자 주인공다운 행동이다. 이쯤되면 네흘류도프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카츄샤 역시 그 대열에 낀 것이 확실하다.

: 작가와 작품은 같이 간다. 따로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톨스토이는 실제로도 귀족 출신이었고 돈도 많았다.

물려받은 영지는 눈으로 보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고 컸다고 한다.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그 자신일지 모른다. 아니 그의 분신이다.

실제로도 그는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작품 속에서처럼 영지 사용을 놓고 농민들의 입장을 많이 경청했다고 한다.

불혹을 훌쩍 넘겨 <참회록>을 쓴 작가는 칠십이 넘어 <부활>의 연재를 시작했다. 그 자신이 엄청난 정신적 변화를 겪었고 그것을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여냈다.

앞서 인간은 타고난 성품을 바꾸기 어렵고 극소수만이 그럴 수 있다고 했다. 그 속에 작가는 물론 네흘류도프나 카슈샤도 들어있다.

그녀는 창녀 생활에 만족했고 술과 남자와 순간의 쾌락을 즐겼다. 그러나 유배지로 가는 도중 네흘류도프의 진심을 알았고 정치범들 틈에 섞이면서 사는 것이 향락만이 아니라 또 다른 길이 있음을 알았다.

도덕적으로 가장 깨끗하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돼 감옥으로 끌려가는 그들의 삶을 통해 카츄샤는 새롭게 태어났다.

그리고 신세계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신이 된 남자 네흘류도프와 신이 된 여자 카츄샤.

엊그제 성탄절이 지났다. 예수의 부활은 인간의 추악함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였다. 한 해가 가고 또 새로운 한 해가 온다.

네흘류도프나 카츄샤처럼 부활은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자신의 살아온 삶을 한 번 뒤돌아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겠다.

<부활>에는 이런 단순한 이야기 외에도 토지는 물 공기 햇빛과 같이 누구의 소유물이 될 수 없는 공공재라 사고팔 수 없다는 혁명적 내용 등 인간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끝도 없는 질문이 쏟아져 나온다.

인생 최고의 순간에 혹은 벼랑 끝에 몰렸을 때, 평범한 일상의 지속으로 삶이 지겹다면 이 책이 작은 해법을 찾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영혼의 정화가 필요하거나 가난한 이웃은 남겨둔 채 호화롭게 사는 사람들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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