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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2-12-01 16:50 (목)
그녀의 새 아빠와 마주치는 것이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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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새 아빠와 마주치는 것이 이상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1.12.15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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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일이 자신이 다니는 학교를 말하자 여순은 자신은 그 맞은편에 있는 여상에 딸린 여중에 다닌다고 했다. 시조사 근처에 집을 샀고 엄마는 새아빠와 빵 가게를 한다고 했다. 

너무나도 친절하고 맑고 밝은 목소리로 여순은 마치 오래 헤어졌다 만난 친언니처럼 성일을 대했다. 웃음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것으로 성일은 맞대꾸했으나 똑바로 보면서 말하는데 주저했다. 

여순은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단정하게 정리한 단발머리와 노란 브라우스에 회색 바지를 입은 여순은 숙녀로 변신해 있었다. 

시골구석에서 검은 가방을 들고 다니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운동화도 신었는데 그 당시 유행하던 외국의 제품이었다. 

그런 여순은 마치 주인집 딸과 같이 기품이 느껴졌다. 왜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환경이 변하면 전혀 딴판으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사람 말이다. 

서울과 여순은 어울렸다. 서울 생활을 할 만큼 충분한 돈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감이 넘쳤고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서울은 시골과는 다른 세상이었고 그런 세상에서 성일을 마주했으니 여순이 명랑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 애가 그 애가 맞아.'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성일이 주눅이 들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이미 여러 책을 읽었다. 가판대의 성인용 책은 물론 교과서 말고도 형이 빌려온 셰익스피어 같은 것을 읽었고 그로 인해 그는 몸보다도 정신적으로 많이 커져 있었다. 

다음에 만나면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햄릿’에 대해 여순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었다. 그런 이야기를 할 자신을 상상하자 성일은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다.

어차피 시골일은 두 사람만 아는 것이고 그것은 이제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여순 네가 이사한 이상 시골에서 부닥칠 일도 없었다.

정태는 되레 그 집 논을 시세보다 싸게 샀다. 그동안 원수였으나 그 집이 도움을 준 것이다. 정태는 편지에서 논을 사서 기분이 엄청나게 좋고 두고두고 행복할 것이라고 편지 말미에 적은 바 있다. 

정태가 좋으니 당연히 용순도 좋고 부모가 그러니 성일도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여순은 자신의 집이 행복하게 만들어준 집의 딸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여순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로 성일은 일상이 조금 바뀌었다. 학교를 오가며 여순에 대한 생각이 늘었고 그러다가 뱀 가게를 그냥 지나치기도 했다. 

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애들과 놀기보다는 수업이 끝나면 잰걸음으로 골목길을 돌고 횡단보도를 급하게 건넌 것은 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것은 언제 봐도 신기했고 기이했다. 

학교 숙제를 깡그리 잊는 것도 뱀을 구경할 때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뱀 대신 백화점을 올려다보고 여순의 웃는 모습이 눈가에 어른거렸다. 

성일은 여순의 이야기를 형에게 말하지 않았다. 둘이 만나고 온 날도 다른 이야기는 해도 여순에 대한 말은 입도 벙긋 안 했다. 굳이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비밀스러움을 간직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말하는 순간 여순과 더는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어떤 미신의 감정도 있었다. 

수업 후나 일요일에 만날 때 간혹 빵을 먹기도 했고 어떤 날은 우유를  함께 먹었다. 빵은 여순이 가져오기도 했으나 빵집에서는 사서 먹었다.

여순은 자기집 가게에 한 번 놀러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성일도 가보자고 꺼내지 않았다. 여순이 싫어한다는 것을 지레 짐작했다.

여순의 엄마를 보거나 한때 머슴이라고 손가락질했던 그녀의 새아빠와 마주치는 것이 이상했다. 그들도 성일처럼 불편해 할 것이 분명했다. 상황이 어쩔 수 없다면 모를까 작정하고 만날 이유는 없었다. 

'우리 집은 공짜야.'

여순이 한 번은 빵을 먹으면서 말했다.

공짜인 빵을 돈 주고 사먹는 것에 대한 비유였다. 그렇지만 그 말 끝에 여순은 입꼬리를 내렸다. 웃다가 급하게 표정을 바꾸는게 쉽지 않은지 약간의 슬픔 같은 것이 입술 주변에 묻어났다. 

성일은 늘 걸었으므로 차비 대신으로 한 달에 한두 번 만나서 쓰는 비용을 지불 할 수 있었다. 

‘걱정마 내가 낼게.’
‘누가 돈이 없을까 봐.’

여순이 입을 삐죽이 내밀고 그런 날은 기어이 자신이 값을 치렀다. 그것도 잔돈이 아닌 지폐를 내서 많은 돈을 거스름돈으로 받았다. 

둘은 만날 때마다 많은 이야기를 했으나 서로 시골에 관한 것은 한마디도 들어 있지 않았다. 특히 여순의 아버지나 엄마에 대한 말은 서로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고 못 할 짓을 한끝에 비극적으로 죽은 일은 언제나 튀어나올 수 있었으나 그것은 해서는 안 되는 금기어처럼 인식됐다.

성일은 그것을 알았다.  누가 가르쳐 줘서 알 수 있는 것도 있으나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녀 엄마도 마찬가지다. 여순의 모친이 남편이 죽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머슴 가운데 한 명과 같이 산다는 소문은 마을은 물론 읍내에도 퍼졌다. 

수군거렸고 만나는 사람들은 그런 재미로 누가 먼저 어떤 소식을 가져올지 서로의 입을 보면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성일과 여순은 마치 시골에 살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토종 서울태생으로 처신했다. 표준말을 쓰고 촌티를 내기않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시골은 이제 먼 세상의 일이었다. 둘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렇게 했고 그러면서 친근감을 더했다.

딱 한 번 여순이 시골에 대해 말 한 적이 있다. 그것도 지나가는 투로 했는데 나중에는 그냥저냥 얼버무렸다. 

성일이 전학 가고 나서 담임 선생이 여순을 불렀다. 여순의 전학 이야기가 막 나온 시점이었다.

선생님은 너도 성일이 간 학교로 가느냐고 물었다. 여순은 성일이 어느 학교로 간 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너 성일이하고 친하지 않니? 하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친한 사람 끼리 그런 이야기도 나누지 않은 것이 의아하다고 선생님은 한 번 더 물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하면서 여순이 얼굴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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