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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9 17:22 (금)
151. 누이 동생을 따라(1930)-순남과 용녀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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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누이 동생을 따라(1930)-순남과 용녀를 위하여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1.12.15 09: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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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자인 나는 여유가 있다. 생활도 그렇고 시간도 그렇다.

일제 식민지 시절 나는 지식인이고 돈도 있고 시간도 남아도는 그야말로 세상 편하게 사는 인간이다.

여름에는 부산 해운대로 해수욕을, 인근의 동래온천에서 목욕을, 심심하면 같이 온 일행과 모기장 안에서 바둑을 두고 술을 먹는다.

그에게 세상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세상이다.

1930년 간악한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한 때였다. 그러니 나의 부유함은 상위 1%에 속할 것이고 나머지는 굶주림과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

순남과 그의 여동생 용녀는 막장의 최전선에 몰려 있다. 이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은 조선팔도 드넓은 곳에서도 흔치 않을 터.

둘은 어엿한 이름도 있다. 그들에게도 부모는 존재했으며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천하의 난봉꾼에 첩이 여럿이다.

제대로 키우지 못하면 낳지나 말지, 이런 한탄은 이들 남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낳은 것은 자유지만 키우는 것에는 책임이 없다. 고된 노동의 뒤끝은 달콤한 휴식이 아닌 매타작이다.

그런 아버지는 어느 날 엄마가 죽은 후 죽었다. 따라 죽은 것이 아니라 더는 주색잡기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돈과 힘을 소진한 결과였다.

남매는 이웃 사는 이모 집에 맡겨졌다. 그러나 오죽하겠는가. 

둘은 서로 가는 길이 갈렸다. 어린 여동생은 어느 곳의 민며느리로 팔려갔고 오빠는 늦은 나이에 소학교에 들어가는 행운을 얻었다.

그러나 학업은 애당초 글러 먹었다. 돈 버는 일이 아니고 쓰는 일은 곧 파장을 맞고 순남은 국수집 심부름꾼으로 전락했다.

▲ 용녀의 오빠 순남은 한 눈과 한 다리를 잃고 단소를 벗삼아 살아간다. 어느 날 동생의 비극적 소식을 들은 순남은 누이를 따라 저세상으로 갔다.
▲ 용녀의 오빠 순남은 한 눈과 한 다리를 잃고 단소를 벗삼아 살아간다. 어느 날 동생의 비극적 소식을 들은 순남은 누이를 따라 저세상으로 갔다.

이때부터 순남과 용녀의 긴 여정은 시작된다. 여정이라고 한 것은 그가 이리저리 옮겨 다닌 것이 전국에 달하기 때문인데 걷다 보면 보이는 산천을 아니 볼 수 없으니 기왕이면 좋게 표현한 것. 그래도 좋은 것은 여기까지다.

이후부터는 참으로 참담한 일의 연속이다. 쓰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남은 지면은 채워야 하고 시작한 일은 맺어야 하니 이들의 뒷그림자를 따라가 보지 않을 수 없다.

국숫집 보이는 그곳에서 오래 머물지 못한다. 먹고 살기 위해 평양을 기점 삼아 진남포로 목포로 원산으로 이리저리 싸 돌아다닌다.

그도 그럴 것이 서모의 폭행으로 눈 하나를 잃은 장애인이 진득이 붙어 있을 곳은 없다. 그러고 싶어도 사람들은 그를 외면한다. 그는 외롭고  쓸쓸하다.

돈이 생기면 술을 먹고 그러다 보니 순남이는 어느 새 주정뱅이가 됐다. 설상가상으로 벌목 현장에서 다리를 다쳤다.

사지 멀쩡해도 살기 힘든데 한 눈과 한 다리를 잃었으니 그의 앞길은 불 보듯 뻔한 이치. 고향을 가고 싶어도 무슨 염치로 갈 것이며 용녀를 찾은 들 뭐라고 말할 것인가.

자포자기 심정의 순남을 위로해주는 것은 손에 든 단소 하나. 소학교 시절 친구가 가르쳐준 단소는 이제 거지 신세가 된 순남을 살려 주는 유일한 무기다.

어느 곳이든 펼쳐 놓고 앉아 구슬픈 가락의 단소를 불면 사람들이 서 넛 모여들고 나중에는 제법 둘러서서 간혹 먹을 것과 푼돈을 준다. 그것으로 순남은 술 먹고 잠자고 하루를 버틴다.

시간이 지날수록 순남은 고향이 그립다. 아니 그립다 해도 자꾸 꿈에 그리게 되고 죽기 전에 동생 용녀를 한번 만나고 싶다. 단 한 번만이라도.( 갑자기 ‘라구요’라는 노랫말이 떠오른다.)

그래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숙이고 평양 영변 근처를 배회했다. 그러다가 자신을 알아보는, 바로 단소를 가르쳐준 친구를 만나 고향 소식을 듣는다.

이모네는 집을 팔고 북간도로 떠났다. 성례를 올리고 그럭저럭 살았다는 용녀 이야기도 들었다. 그럭저럭 살던 용녀는 아편쟁이 남편이 평양 유곽에 돈을 받고 팔아넘기면서 속된 말로 신세 조졌다.

이때부터 용녀는 몸 파는 창기로 전국을 돌아다녔다.

여기서부터는 감히 여정이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용녀는 대련까지 갔다. 순남은 대련으로 찾아갔으나 용녀는 이때 계월로 이름을 바꾸고 서울로 옮겼다.

대련에서 도보로 한 달을 걸려 순남은 마침내 서울에 도착했다. 그런데 계월은 그 사이 군산으로 떠났고 역시 한 달여 만에 걸어서 군산 유곽에 도착했으나 용녀는 다시 부산으로 떠난 뒤였다.

앞서 해운대니 동래온천이니 했으니 부산이 용녀의 종착지가 되겠다.

관찰자 나는 소일을 하다 어느 젊은 처자가 바닷가에 빠져 죽었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밤하늘을 벗 삼아 술을 마시다 단소를 소리를 듣고 그 사람을 초청한다. 바로 순남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순남이 관찰자인 나에게 들려준 것이다. 그리고 열흘이 지났다. 단소 불던 사람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리를 나는 듣는다.

오빠는 누이를 따라 그렇게 갔다. 세상은, 이런 세상은 남매에게 존재해서는 안 되는 비열하기 짝이 없던 세상이었다.

: 최서해의 작품 가운데 비극이 아닌 것이 없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소설보다 더 비극적인 것이 현실이었으니 작가의 눈에 소설 속 이야기는 차라리 나은지도 모른다.

대표작인 <홍염>의 경우( 이 코너에서 소개한 바 있다.)

살인과 방화로 극단에 처한 주인공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 어쩔 수 없이 찌르고 불 지르면서 파국에 달하는 비참함을 다뤘다. 그런데 <누이 동생을 따라>는 조금 다르다.

상대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스스로 파멸하는 것이다. 유곽을 전전하다 더 버틸 수 없어 바닷가에 몸 던진 용녀나 그런 동생을 찾다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따라 죽는 순남은 체념의 끝에서 스스로 자멸했다.

처절함에 있어서는 어느 복수에 못지않다. 그러나 주변을 묘사한 대목들은 매우 서정적이다.

“푸른 잔디와 흰 모래 깔린 저편에 굼실거리는 바다를 스쳐오는 바람은 어느 때보다도 더욱 경쾌한 맛이 있었다.”

“달빛에 흐르는 바다를 고요히 바라보고 있던 나의 가슴은 흘러오는 단소 소리에 아른아른 흔들렸다...이어지는 듯 끊어지는 듯 굵고 가늘게 흘러오는 그 소리는 밝은 달빛과 조화되어 달빛이 단소 소리인지 단소 소리가 달빛 소린지 바다와 산을 스쳐 먼 하늘가를 흐르는 그 소리는 때로 여울 소리 같이 격하고 때로 먼 하늘의 기러기 소리 같이 처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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