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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일은 바로 앞에서 그 사람 얼굴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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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일은 바로 앞에서 그 사람 얼굴을 보았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1.11.17 10: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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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인 형은 먼저 집을 나섰고 성일은 뒤따라가기 위해 달음질을 시작했다. 황토배기를 넘고 과붓집을 지나 기적 소리가 들리는 벌판 앞까지 왔다.

거기서 성일은 잠시 멈춰 섰다가 달리는 대신 걸었다.

누군가 앞쪽에서 걸어오는데 간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름한 모자를 쓰고 사방을 기웃거리는 모습이 수상했다.

두 손은 리어카의 손잡이를 잡았으나 고개는 사방을 경계하는 듯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간첩식별 요령 가운데 이른 아침에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 딱 어울렸다. 그는 엿장수였다. 엿장수가 이른 시간에 걸어오고 있다. 일러도 너무 이른 시각이었다.

성일은 바로 앞에서 그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그 순간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산에서 방금 내려온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에 살기가 비쳐드는 관상이었다.

간첩이 고물장수나 보따리장수로 변장하고 전국을 다닌다고 하더니 엿장수로 변신한 간첩이 자신 앞을 지나고 있었다. 지난번에 수사기관이 놓쳤다는 간첩이 이 간첩일 거라는 확신이 섰다.

말로만 듣던 간첩과 맞딱뜨린 것이다. 그 순간 성일은 얼어붙었다는 말에 딱 어울리게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만연필처럼 생긴 독침이 얼굴을 찌를 것만 같았고 사탕으로 속인 독약을 억지로 입으로 밀어 넣는 공포감이 온몸을 싸고돌았다.

간첩을 만나면 지체없이 신고하라는 말은 들었어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마음가짐은 없었기 때문에 성일은 당황했다. 설사 들었다고 해도 실제 상황에서는 허둥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디서 신고를 하지.

학교는 멀리 떨어져 있고 지서는 더 멀었다. 신고를 해야 한다는 열망만 앞섰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성일은 간첩을 앞에 두고도 어쩔 수 없는 자신을 한탄했다.

그러다가 찔리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바로 죽는다는 독침이 생각나자 우선 이 자리를 무사히 지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는 모르는 척하고 옆으로 비켜서서 간첩이 아무일 없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짧은 1, 2초의 시간이 그렇게 길 수가 없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진정하고 뒤돌아보니 리어카는 어느새 언덕을 향고 가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성일은 마구 달렸다. 한참을 달려 방앗간 모퉁이를 돌자 형의 뒷모습이 보였다.

‘형, 저기 간첩 지나갔어. 빨리 신고하자.’

형이 목소리를 듣고 멈춰섰다.

형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형과 같이 있던 친구는 누구? 엿장수? 하고 반문했다. 그러더니 어 그 사람 농사일 끝나면 엿 파는 우리 동네 사람이야.

형이 웃었다. 친구는 더 크게 웃었다. 엉뚱한 사람을 간첩으로 신고하면 못써. 성일은 그 말을 뒷전으로 흘리고 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간첩이 아니라는 안도감과 간첩신고를 하지 못하는 아쉬움, 하마터면 남에게 피해를 줄 만한 행동에 대한 반성 같은 것이 뒤섞여 뒤숭숭했다.

아스팔트 길로 접어들었다. 위로 가면 학교 쪽이고 아래로 가면 6학년 때 소풍 갔던 해수욕장이 있는 동백정이 나온다.

그는 왼쪽 길로 바짝 붙었다. 트럭 한 대가 휙, 하고 지나갔다. 오랜만에 보는 트럭이다. 운 좋으면 보는 차였다.

도로는 나 있었으나 인도가 없어 차보다 아이들이 도로에 더 많았다. 학교에 가까이 올수록 숫자는 더 늘어났다.

곡선 길을 지나면 학교가 보일 것이다. 성일은 문방구 근처에 거의 다 와서야 여순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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