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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2-01-20 06:03 (목)
기차는 그 시간에 장항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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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그 시간에 장항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1.11.01 16: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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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성일은 황토배기를 넘으며 여순이 어디쯤 가고 있을지 상상했다. 그러면서 달렸다.

뒤에 올지도 모르지만 왠지 앞서가고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달릴 때 성일은 기분이 좋았다.

그 순간은 여순 생각도 나지 않았다. 여순때문에 달렸는데 달리다가 그만 그 생각을 잊어버렸다.

마침 길가에 매둔 소가 똥을 싸지르고 있어 코를 막으며 더 세게 달려나갔다. 어느 정도 달렸다 싶으면 그만 두었다. 대개는 과부집이 보이는 언덕이었다.

언덕에 오르면 운좋을 때는 멀리서 울리는 기차의 경적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면 아침 8시였다. 기차는 그 시간에 장항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호흡을 가담듬을 즈음에는 호젓한 길로 접어들게 마련이고 그때는 소똥을 뒤져 쇠똥구리를 잡았다. 이때 쇠똥은 피하기보다는 다가서는 존재였다.

쇠똥구리의 검은발에 묻은 갈색똥을 털고나면 녀석을 손에 쥐고 다시 달렸다. 손안에서 꿈틀거리는 쇠똥구리의 느낌이 좋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숲속으로 멀리 던졌다.

살아야 할 곳은 손안이 아니라 소들이 다니는 숲속 길목이었기에 그의 집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그리고 또 달려나갔다.

달리면서 성일은 여순이 어디쯤 오고 있을지 짐작했다. 자신과 한참 떨어졌을 것이다. 아마도 매바위를 지날 것이다. 황구가 짖어대는 늙은 과붓집을 앞두고 있거나.

그런 생각 하면 기분이 더없이 좋았다.

돌아올 때도 그랬다. 여순이 앞서가는지 살폈다. 뒤에 오는지 돌아봤다.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앞으로 마구 달렸다. 지금 생각하면 좋을리도 없는데 뭐가 그리 신났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간혹 지친 몸을 억지로라도 끌고 안양천을 달릴 때면 그때의 일이 간혹 떠오른다. 그렇다고 힘을 얻지는 못하나 나도 한때는 그런 때가 있었다고 자위하면 분위기는 바뀐다.

그런데 어느 날 상상이 아닌 현실이 눈앞에 나타났다. 저 멀리서 여순이 가고 있었다. 뒤에 있지 않고 앞서 가고 있었다.

대충 보고도 성일은 여순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오늘은 일찍 나왔나 보다. 기척을 느낄 수 없을 만한 거리까지 와서 성일은 달리기를 멈추고 걷기 시작했다.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여순이 가고 있다. 이 정도 시간에 이 정도 거리라면 9시 등교는 넉넉하다.

여순이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지, 성일도 따라 멈추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고 다시 걸었다.

성일은 그녀가 멈춘 지점에서 정확히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꽃이었다. 하얀 들국화였다.

소가 밟고 지나갔는지 잎이 짓물러 마른 흔적이 보였다. 성일은 여순이 잠시나마 머물고 떠난 자리에서 그처럼 고개를 숙였다.

여순의 체취대신 국화향이 강하게 코 끝으로 밀려들었다. 이 자리는 여순이 떠났으므로 이제부터 내 자리다, 성일을 그렇게 생각하고 길가의 나뭇가지를 꺾어 표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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