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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2-01-20 06:03 (목)
반장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염라대왕 앞으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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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장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염라대왕 앞으로 끌려갔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1.10.29 11: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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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의 시기에도 살아남았다. 전쟁통에서도 몸 하나 다치지 않았던 반장은 시골 촌구석에서 뻗었다.

남들은 다 죽어도 살았는데 그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촌로가 휘두른 낫질 한 방에 갔다.

늘 차고 다니던 권총을 뽑을 시간도 없었다. 어어어, 하다가 눈을 감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날 때 그는 어이가 없었다.

피 묻은 낫을 들고 벌벌 떨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개가 죽었다, 개가 죽었다 소리치면서 산소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개가 죽었다, 반장은 자신을 죽인 자의 말에 헛웃음을 지으며 따라했다. 그러자 목울대를 타고 피가 벌컥벌컥 쏟아져 나왔다. 개가 죽었다, 반장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염려대왕 앞에 끌려갔다.

시간이 흘렀다. 모든 일어난 사건들은 시간과 함께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야말로 개죽음당한 반장은 어디 하소연할 곳 없이 서둘러 매장됐다.

정승 집 개가 아닌 정승이 죽었어도 상갓집이 들어찼다. 조문하기보다는 공짜 밥과 술 욕심 때문이었다. 호기심 때문에 읍에서 구경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부인은 그런 사람들에게 돼지를 잡을 기분이 아니었다. 첩들이 크게 울어 상갓집 체면을 채웠다. 지서에서도 몇 사람이 왔으나 밥만 먹고 그냥 돌아갔다.

그가 변변한 상여도 없이 관 채 매장될 때 마을 사람들은 겉으로는 안됐다는 표정이었으나 속으로는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마지못해 눈가를 훔치던 그 집 본부인은 어느새 새 단장을 하고 머슴을 부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로 부린 것이 아니라 남편으로 그렇게 했다. 수군거리는 소리를 그녀는 게의치 않았고 죽은 반장처럼 위세를 부리려고 했다.

하지만 한계는 분명했다. 마을 사람들은 더는 그 집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싫은 내색을 하지도 않았다. 부잣집에서 뭔가 콩고물이 있나 해서 부인네들은 기회를 노리는데 열중했다.

봄방학이 끝나고 그 집 딸이 중학교에 들어갔다. 여순은 성일과 동창생이 됐다. 나이도 같고 생일도 같은 3월 달이었다. 둘은 말은 안 했으나 서로를 의식했다.

중학교는 초등학교보다 더 멀어 걸어서 팔 킬로미터를 가야 했다.

간혹 성일은 여순과 마주칠 때가 있었다. 황토배기를 넘거나 늦어서 급하게 달려갈 때 저 멀리서 혼자 걸어가는 여순을 발견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성일은 놀라서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서곤 했다.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면 달려서 앞서 갈 것인지 걸어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뒤에 갈 것인지 고민했다.

그런데 대개 이런 고민은 쉽게 해결됐다. 마을을 차례로 지나면서 아이들이 하나씩 합류해 자연스럽게 남자애들은 남자애들끼리 모였다.

여순은 여학생들과 조잘댔다. 여순은 아버지와는 달랐다. 반장의 날카로움은 없었다. 눈은 선했고 몸은 엄마를 닮아 크고 날렵했다. 애들하고도 잘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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