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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29 23:03 (금)
희생은 나의 것이 아닌 그들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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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은 나의 것이 아닌 그들의 것이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1.09.30 15: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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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부에서는 잔당을 즉각 제압하라고 독촉했다. 대통령의 관심사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승진의 당근과 불명예 퇴진의 채찍을 받고 대대장은 반장을 불렀다.

마방천, 일 끝내야지.

그렇게 한가해.

아닙니다.

대답할 것 없어, 빨리 나가.

그는 정예 1개 소대를 이끌고 지리산 뱀사골에서 더 위쪽으로 병사들을 몰았다. 잔당은 최대 30명, 최하 13명 정도로 파악됐다.

반장은 자신이 잔당이라면 지금 어떤 심리인지 생각했다. 사태가 벌어진 지 일주일이다. 보급로는 끊겼다. 인간이 먹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한계선은 지났다.

그들도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항복하거나 자살하거나 도주하거나 뭐 이런 선택을 놓고 옥신각신할 것이다.

그러나 궁지에 몰린 쥐들은 힘센 놈의 말을 따르기 마련이다. 강성분자의 주장은 늘 옳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분오열된 인력을 골수분자 한 명이 쥐고 흔든다. 반장은 그 쥐고 흔드는 자가 자신이라는 착각에 빠졌다. 권총을 빼들고 동료를 위협하면서 최후의 일전 운운하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봤다.

그렇다면 쥐고 흔드는 자와 무리를 분열시키는 방법이 최선이다.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삐라를 뿌리고 그 삐라에 소고기 그림을 그려 넣으면 분명히 일부는 밤에 몰래 내려와 손을 들 것이다.

그러면 그자를 통해 남은 자들의 위치를 파악해 섬멸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러나 이는 상부가 느린 것보다는 빠른 것을 원했다.

대대장은 사흘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마지노선이고 실상은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끝내야 한다. 이 경우 우리 편의 피해도 불가피하다.

반장은 자신의 죽음은 상상하지 않았다. 반면 소대원들이야 그들의 운명에 달린 것이니 희생은 나의 것이 아닌 그들의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우리측의 희생은 어떻든 적을 제압하기만 하는 방식을 택했다.

무식하지만 무차별 공격, 전원 공격 대형을 취하기로 했다.

전쟁의 막바지에서 죽는 것은 개죽음이지만 반장과는 상관없는 일이었으니 그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공격 명령을 내렸다. 

반장은 살아야지, 살아야지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세 번째 분대에 합류했다. 일 분대가 가고 나서 한 시간 후였다.

해는 중천이고 멀건 대낮에 작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위험하지 않은 일이 어디 있는가.

반장은 앞선 분대원들이 간 길을 따라가면서 앞쪽에서 어떤 변화가 있는지 귀를 쫑긋거렸다. 그때 적의 잔당 중 일부가 자수하기 위해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세 명 정도가 흰 깃발을 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제일 먼 저 본 소대장이 사격명령을 하려다 말고 멈췄다. 죽이면 깨끗하지만 잔당을 소탕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한 명을 죽이고 두 명을 살리기로 했다.

그는 권총 사거리까지 다가온 잔당 가운데 한 명을 처리했다. 나머지는 엎어 지면서 응사할 준비를 했다. 소대장은 확성기를 들고 말했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무기를 버리고 손들고 나오라, 그러면 소고기를 준다’.

‘다시 한 번 반복한다’.

‘손들고 나오면 소고기를 준다’.

‘아니면 피를 흘리고 꽥꽥 오리처럼 소리 지르다 죽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엎어진 그들은 쓰러진 대원의 죽음을 확인했다. 망설이는 동안 소대장은 한 번 더 외쳤다.

‘시간이 없다. 셋 셀 동안 안 나오면 공격하겠다. 손들고 나와라’.

‘안 그러면 오리처럼 꽥꽥 소리 지르다 죽는다’.

두 명은 서로 눈짓을 했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들은 오리처럼 꽥, 꽥 소리를 지르며 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어서려고 손을 짚었는데 방금전 죽은 대원의 피가 손을 흥건히 적셨다.

그는 깃발 옮겨 들고 피 묻은 나머지 손을 바지에 쓱쓱 문지르면서 외쳤다.

‘항복하겠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반장은 대대장에게 무전 보고 하는 대신 그들을 몇 차례 발로 차고 개머리판으로 치고 나서 쓰러진 자들에게 말했다.

잔당 어디 있나?

몇 명이야?

그들은 대답하기 전에 꾸물거리지 않았음에도 반장의 워커발로 한 번씩 호되게 더 맞고 나서 동시에 대답했다.

적은 모두 15명이었고 지금 세 명이 나왔으니 12명이다. 12명이 세 개조로 나뉘어 매복해 있다.

무전병이 다가왔다. 그는 수화기를 받지 않았다. 대신 물을 달라고 신음하는 적군을 한 번 더 걷어찼다.

마침 옆에서 수통을 건네주던 소대원은 수통이 반장의 다른 발에 차여 멀리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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