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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8. 봄날은 간다(2001)- 미운 건 그녀아닌 오히려 나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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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8. 봄날은 간다(2001)- 미운 건 그녀아닌 오히려 나였어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1.09.28 1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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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전쟁이 잔인했지만 한국전쟁만큼 참혹했던 전쟁은 없었다. 같은 민족끼리, 부모형제끼리 총부리를 겨눴고 폭탄을 투하했으며 대검으로 찔렀다.

그러나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꽃은 피고 꽃은 진다. 하얀 설원에 뿌려진 핏빛 살점들은 지천으로 피어나는 진달래에 묻히고 봄에 잠겼다.

전쟁은 끝났다.

1954년 대구 유니버셜레코드가 새로 생겼고 그곳에서 백설희는 노래를 불렀다.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의 ‘봄날은 간다’는 무참히 무너진 슬픈 영혼들을 위로했고 찢어진 넋을 건져 올렸다.

사람들은 위안을 받았고 살아보자고 발버둥 쳤다. 별이 뜨면 같이 웃고 별이 지면 같이 울면서 손에 손을 잡고 보릿고개를 넘어갔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는 백설희의 노래를 고비마다 배경으로 깔았다. 애잔하고 슬프고 때로는 들뜬 이 노래는 영화 속 주인공 남녀의 심리를 대변했다.

사랑의 알뜰한 그 맹세에 관객은 숨죽였고 달이 지고 시들한 사랑이 왔을 때 복장을 터트렸다.

상우(유지태)는 은수(이영애)를 보는 순간 이 여자를 사랑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 그래서 사랑의 마음을 키웠고 정성을 다했으며 그녀도 그가 자신을 사랑하기를 목을 길게 빼고 기다렸다.

그런데 둘이 기다리는 장소는 그야말로 기가 막힌 곳이어서 설령 그들의 사랑이 실패한다고 해도 그리 나쁠 것 같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대밭에서 좀 놀아본 사람이라면 그곳이 젊은 청춘에게 얼마나 좋은지 안다.

거기다 바람까지 불어온다면 그야말로 소리가 없어도 환상적이다. ( 어린 시절 집 뒤가 온통 대나무 천지였다.

어른 팔뚝 만 한 대나무가 하늘 높이 솟구쳤고 놀이가 없던 시절 그 대나무를 타고 높이 높이 올라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주윤발처럼 대나무와 대나무 사이를 날면서 칼을 휘두르지는 못했지만 휘어진 대나무에서 올 곳은 저쪽 대나무로 옮겨 탄 적은 있다.

작은 몸이라도 높이 가면 대나무는 활처럼 휘어졌는데 구부러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게 활의 중간 부분에 거꾸로 매달려 오랫동안 하늘 구경을 했다.

그때 대와 대가 부딪치면 내는 소리, 댓잎이 흔들리는 소리를 원 없이 들었다. 그 소리를 다시 들으니 감회가 어찌 새롭지 않겠는가.)

갈대숲은 또 어떤가.

이병헌이 숨죽였던 신성리 갈대밭은 고향 근처라 여러 번 들렀으니 그곳의 소리 또한 낯선 풍경은 아니다. 갈대는 어른 키보다 크고 빽빽해서 영화처럼 그곳에 있으면 철새조차도 사람이 있는지 알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은폐와 엄폐가 가능하다.

혈기 왕성한 상우와 은수가 이런 장소에서 둘만이 만나고 있다면 목석이라 한들 깨어나지 않을 수 없다.

돌아오는 차 안은 그야말로 어색하기보다는 안락한 보금자리가 따로 없다. 거기다 방송국 아나운서인 은수의 녹음된 목소리가 라디오로 흘러나온다면.

이 보다 더 완벽한 플레이스는 없다. 강릉과 서울을 오가는 어느 날 은수는 말한다.

‘라면 먹고 갈래?’

마음속 깊은 저곳에서 쾌지나칭칭나네 노랫소리 절로 난다. 음흉한 미소를 숨긴 상우가 이게 무슨 뜻이지? 세상 순진한 녀석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라는 듯이 마지 못해 그러마 하고 따라 들어간다.

두 남녀는 실제로 라면을 먹는다. 다 먹고 나서 그녀는 또 이런 말을 한다.

자고 갈래?

실제로 두 사람은 같은 집에서 잔다. 그러나 그것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그녀가 이런 말로 대시하는 그를 저지한다.

좀 더 친절해지면.

그런데 친절해지는 데는 딱 하루면 됐다.

이제 두 사람은 마음도 몸도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그즈음 상우 아버지는 상우에게 여자가 생긴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그만한 이유 없이 매사에 실실 웃을 수는 없을 터. 왜 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고 하지 않던가.

‘여자 있으면 데려와라’.

나도 손주 재롱 좀 보자는 말이 뒤따른다. 할머니도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 치매는 점점 심해진다. 상우는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이번에는 상우가 먼저 제의한다.

나랑 결혼할래?

▲ 이영애와 유지태는 진짜 사랑했던 남녀, 진짜 헤어지는 남녀의 연기를 실감나게 했다. 소리의 영화였으나 영상의 영화였다.
▲ 이영애와 유지태는 진짜 사랑했던 남녀, 진짜 헤어지는 남녀의 연기를 실감나게 했다. 소리의 영화였으나 영상의 영화였다.

그녀는 대답을 망설인다. 이혼녀인 은수는 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는 지금은 서로 사랑하지만 언젠가는 변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기에 이 정도에서 끝냈으면 한다.

그녀는 상우 대신 다른 남자를 찾아 허전한 옆구리를 채워놓고 알아서 떨어져 나가기를 기다린다. (이영애는 더는 ‘친절한 금자씨’가 아니다.)

그러나 상우는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사랑은 변치 않을 것을 확신했기에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같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 말을 뱉고는 터질 것 같은 고통의 심연 속으로 빠져든다.

산사에서, 대나무밭에서, 갈대숲에서 그리고 둘만의 보금자리에서 그렇게 언약했던 모든 것들은 이제는 조용필의 ‘허공’ 속에 묻혀 버렸다.

이제부터 상우는 깔끔하기보다는 본격적으로 ‘찌질의 세계’로 빠져든다.

너 같은 건 이제 신물이 난다고 해도 미련을 떨칠 수 없어 그녀를 불쑥불쑥 찾는다. 그녀의 웃음은 이제 싸늘한 냉소로 바뀌었다.

이보다 찌질할 수 없을 데까지 온 그는 그녀를 어쩔 수 없는 가운데 잊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말을 한다.

우리 같이 있을까? (이제 찌질함은 그녀의 몫일까.)

내가 상우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관객들은 한 번 생각해 보길 바란다. 나라면 당연히 예스지, 라거나 당연히 노지 라고 갈릴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상우가 아닌 이상 상우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을 비난하지는 말자. 은수 역시 마찬가지다.

등 떠밀 때는 언제이고 이제와서 다시 만나자고? 이거 미친 거 아냐, 같은 격한 말은 삼가자. 우리 모두는 상우가 아닌 것처럼 은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 한국

감독: 허진호

출연: 유지태, 이영애

평점:

: 주제곡 ‘봄날은 간다’는 내내 들었다. 그렇다면 이 영화와 어울릴만한 다른 노래를 하나 추천한다.

그러기에 앞서 늑대가 밤하늘을 보고 울 때는 대개 ‘우우우’ 하고 운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바란다. 상실감에 빠진 상우도 울었다. 우우우 하고 늑대처럼.

이때 상우는 암컷 잃은 수컷 늑대 왕 로보와 견줄 만하다. 로보가 울부짖는 단장의 울음소리가 들리는가. 들리지 않는다면 김창완이 부른 ‘회상’으로 달빛 아래 고고한 늑대를 불러보자.

이미 그대는 떠났다. 봄날은 갔으니 마음은 차가워질 것이다. 오뉴월 추위에 얼어붙지 말고 잘 차려입고 길을 떠나자. 당연히 그대는 옆에 없고 나 혼자 걷고 있다.

이미 돌아서 버린 그 사람, 아, 생각 나네 잊지 않았지 중얼거리면서 남몰래 한 바가지 눈물을 뿌리자.

눈물 콧물이 옷을 적시기 전에 고개 들고 다시 한번 우우우 떠나버린 그 사람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다시 흐느켜 보자.

이때 중요한 것은 왜 나를 떠났느냐 같은 우매한 질문으로 더는 속을 썩이지 말자는 것. 나는 늑대가 아니고 사람이다.

미운 건 그녀가 아니라 바로 나 아닌가. 이것도 부족하다면 남진이 부른 ‘미워도 다시 한번’, 이 생명 다 바쳐서 죽도록 사랑한 그녀를 한 번 더 마음에 담아보자.

믿고 또 믿었건만 영원히 사랑할 수 없는 그 사람을, 이제는 안녕!하고 작별을 고하자.

언제나 할머니를 위로했으나 여자와 버스는 떠나면 잡는 게 아니라는 위로를 받으면서 위안 삼자.

서산의 해가 지고 싶어서 지느냐, 만남과 헤어짐은 운명인 것이다. (노사연의 ‘만남’도 들어볼까, 내친김에.)

평이 되지 않게 늘어진 것은 영화가 끝내야 될 타이밍을 놓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계속 밀려왔기 때문이다. (다 끝나고 나니 그 장면을 뺏더라면 ‘앙꼬 없는 찐빵’이었다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한편 영화의 주제곡은 백설희가 부른 오리지널도 좋지만 이미자나 배호 버전도 기가 막히니 여운을 즐기고 싶은 사람은 여러 타입으로 들어보자.

사족: 시대의 흐름과 함께 영화도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

그래서 어, 저 장면 이해 안 가네, 예를 들면 이영애를 무릎에 앉히고 도로를 달리면서 운전 연습하는 장면, 아무 데서나 담배 피는 모습은 눈에 거슬린다.

그런가 하면 한가했던 수색역, 자판기 커피, 가정용 노래방 기계 등은 아련했던 그 시절 추억을 떠올린다. 영화가 나온지도 벌써 20년이다. (아 참, '세상은 요지경'을 부른 신신애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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