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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스런 어느 날 반장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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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스런 어느 날 반장이 돌아왔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1.09.27 14: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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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보기에 세상은 태평스러웠다. 그런 어느 날 반장이 돌아왔다.

검은 트럭에 세간을 잔뜩 싣고 그는 먼지를 날리며 마을 앞길에 차를 댔다. 검은 양복을 입고 회색 모자를 쓴 그는 감회에 젖은 듯 마을을 둘러봤다.

몸을 돌리면서 그는 들고 있는 지팡이로 땅을 툭툭 쳤다. 마치 여기를 찍었다는 듯이 그러니 내가 찍은 곳을 건드리지 말라는 표시였다.

멀리서 보아도 그의 행동은 거침없었다. 안방에 드러누워 마당 가의 하인을 부리는 듯했다.

시선이 멈춘 곳은 그가 떠난 자신의 집이었다. 그곳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집에서 일하던 머슴이 저녁밥을 짓고 있었다.

갑자기 시장기를 느낀 반장이 부인에게 눈짓했다. 양산을 내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부인은 마침 잘 됐다는 듯이 남편의 팔을 끌어 재촉했다.

하지만 반장은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접은 양산을 휘두르며 부인이 그대로 멈춰선 남편을 놔두고는 먼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마지못해 반장이 그 뒤를 따랐다.

집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은 기척도 없이 소리부터 질렀다. 지팡이와 양산이 동시에 사립문을 쳤다.

머슴이 누군가하고 마루에서 토방으로 내려와 주인처럼 못마땅한 듯이 한마디 했다.

‘거 누구셔유’.

‘내다 이놈아’.

반장이 외쳤다.

사태 파악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머슴은 바짝 고개를 숙이더니 짚신도 신지 못하고 허둥댔다. 그는 주인의 하명을 기다리듯 한쪽으로 비켜섰다.

‘여기 반장이 누구여’.

‘정태라고, 저기 대나무밭에 사는.’

뭐여, 그자가 반장여.

반장은 짚고 있던 지팡이를 마루에 획 소리 나게 던져 버렸다. 날아간 지팡이가 창호지 문을 뚫고 안방으로 들어가다 중간에 걸렸다. 껄껄 웃는 소리에 동네 개들이 짖어댔다.

‘참 신기해, 나는 쏘면 맞아’.

품에서 권총을 꺼내 반장은 머슴을 쏘는 시늉을 했다.

어디서 달려왔는지 혀를 뺀 개 한 마리가 반장에게 달려들다가 멈칫하고는 컹컹 악을 썼다.

‘이놈의 개새끼’.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머슴이 개를 발로 찼다. 서슬 퍼런 주인의 모습에 개는 다리 사이에 꼬리를 끼고는 낑낑거렸다.

‘저리 꺼져 맹구야, 주인어른이시다.’

어느새 지팡이를 들고나온 머슴이 반장 앞에 서서 쩔쩔맸다.

‘너, 그새 덩치가 많이 커졌다’.

반장이 지팡이로 머슴의 어깨를 몇 번 쳤다.

소문은 퍼져 나갔다. 다음날 돌아온 반장은 주민들을 불러 모았다. 그럴 자격이 있는지 모를 일이지만 사람들은 그자가 시키는 대로 집합했다. 13년 만이었으나 예전의 그를 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장은 선심을 베풀었다. 옷가지를 나눠줬고 돼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다. 인심은 그에게로 돌아섰다. 남의 닭을 잡아먹고 사람을 패던 예전의 그가 아니라고 떠들었다. 그가 없는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돈이 많다고 했다. 경찰이었다가 군인이 됐다고도 했다. 그의 편이 되기 위해 사람들은 앞다퉈 그를 칭송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얘기라면 먼저 알리기 위해 골머리를 짜냈다. 그러면 그는 친구처럼 말해줘서 고맙다면서 우린 이제 친구라고 손을 내밀었다.

1946년 정국은 혼란스러웠다. 해방됐으나 여전히 일제의 잔재가 판을 치고 있었다. 선거로 시끄러웠고 남북은 서로 적대했다. 친일파들은 다시 살아났다.

경찰은 다시 경찰이 됐고 군인은 다시 군인이 됐다. 부자는 다시 부자가 됐으며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했다.

세상이 뒤집어졌으나 흰옷 입은 사람들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바뀐 것이 없었다.

반장은 그런 냄새를 맡았다. 그에게 이런 시국은 한자리 차지할 좋은 기회였다. 굳이 사서 고생하지 않아도 됐으나 지레 겁먹은 자신이 바보스러웠다.

그러나 좁은 고향 바닥보다는 기왕 나온 것 넓은 세상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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