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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 컬러 퍼플(1985)-사랑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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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 컬러 퍼플(1985)-사랑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1.09.12 11: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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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물의 귀재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컬러 퍼플>은 그가 드라마에서도 그렇다는 것을 입증했다.

상을 노렸든 아니든 간에 이 영화는 아카데미의 주목을 받아 작품상 등 무려 11개 부문에 후보에 올랐다.

그러나 단 한 개의 상도 받지 못했는데 이유를 밝히지 않아 속내는 알지 못하나 흑인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에 대한 투표자들의 반감 때문이라는 설이 나오기는 했다.

상을 못 받았다고 해서 이 영화가 수상작과 견줘 떨어진다고 말할 수는 없다. 되레 그 반대라고나 할까.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비극과 그 비극을 극복하는 인간애, 그리고 마침내 되찾은 행복이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그 과정이 무슨 수학 공식처럼 딱딱 아귀가 맞는데 이는 할리우드 영화가 원하는 방식 그대로다. 그래서 상을 받지 못한 것을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는 관객들이 있고 필자도 그중 한 사람이다.

서두가 길었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자.

코스모스가 만개한 지금의 계절 바로 가을이다. 가을엔 떠나지 말라고 어떤 가수는 애절하게 노래 불렀으나 셀리( 우피 골드버그) 는 그럴 수 없다.

집을 떠나는 14살 아이는 성냥팔이 소녀처럼 가엽다.

계부의 아이를 둘씩이나 낳은 그녀는 또 다른 아이를 낳기 위해 팔려갔다. (남아 있으나 다른 곳으로 가나 괴롭기는 마찬가지니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난다고 가여운 것이 아니라 인생 자체가 그렇다는 말이다. )

언니가 없는 집에 홀로 남은 동생 네티(아코수아 부시아)의 운명 역시 보잘것없다.

계부의 음흉한 눈길이 네티에게 쏠일 때쯤 앨버트( 대니 글로버) 라는 40대 이웃 농장주가 피부색보다 더 검은 옷을 입고 네티와 결혼하겠다고 나선다.

못생긴 언니에 비해 동생은 예쁘기 때문이다.

계부는 어리다는 이유로 네티의 시집을 반대했으나 흑심은 다른 데 있다. 그래서 그는 대신 셀리를 가져가라고 준다.

둘이 있을 때만 행복했던 자매는 그렇게 헤어졌다.

언니는 네티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환영식 대신 전처 아이들의 돌멩이 세례를 맞으며 네티의 청혼자를 남편으로 맞는다.

그자는 계부보다 한술 더 떠 패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그래도 셀리는 웃는다. 바보처럼 그녀가 웃을 때 관객들은 운다.

어느 날 네티는 계부의 손아귀에 벗어나려고 언니가 사는 집으로 도망친다. 언니의 남편 그러니까 네티의 행부 앨버트는 내심 바라던 바라 당연히 그녀를 새 식구로 받아들인다.

모처럼 만난 언니와 동생은 끌어안고 기쁨에 들떠 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오래가지 않는다. 자매가 웃을수록 뒤에 벌어질 불행의 강도는 그 만큼 더 세진다.

앨버트가 학교가는 네티를 덮쳤다. 그러나 네티는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다. 이제 그녀는 집도 절도 없다. 네티는 떨어지지 싫은 언니와 눈물로 작별한다.

떠난 네티를 셀리는 오매불망 잊을 수 없다.

그가 기다리는 것은 네티의 편지뿐, 동생의 소식을 들을 수만 있다면 앨버트가 부리는 온갖 패악질도 감내 할 수 있다. 고난의 행군이 그녀가 가야 할 길이 아닌가.

그러나 편지는 끝내 오지 않고 셀리는 절망에 빠진다. 그때 순회공연 가수인 남편이 첩이 오고 그런 그녀를 셀리는 싫은 내색 없이 보살핀다.

떠돌이 가수도 셀리에게 동정심을 보이고 그녀 덕분에 셀리는 잠시 해방의 기쁨을 맛본다.

그리고 긴 세월이 흘렀다.

▲ 여자고 흑인이고 못생기고 배운게 없는 셀리의 삶은 이보다 더 비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려에게는 동생을 만나 손뼉치기를 하는 기쁜 순간이 있다.
▲ 여자고 흑인이고 못생기고 배운게 없는 셀리의 삶은 이보다 더 비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려에게는 동생을 만나 손뼉치기를 하는 기쁜 순간이 있다.

10대 소녀는 어느새 중년이다. 그녀는 지구상 어딘가에 동생이 살아 있다는 희망의 끈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 그러던 어느 날 네티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셀리의 눈이 반짝인다.

기린이 뛰는 아프리카에서 그녀가 있는 아메리카로 네티가 온다. 존슨의 우체통이 비로소 제 역할을 하는 순간이다. 거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악마 앨버트( 미스터와 동일 인물)가 네티의 편지를 숨기지 않고 언니가 있는 곳 다시 말해 자신의 집으로 오도록 주선한 것이다. 네티를 차지하려는 앨버트의 속셈은 이제 영화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앨버트가 어떤 이유로 심경의 변화를 가져왔는지 알 수 없다.

그가 스스로 얻은 철학적 힘을 바탕으로 참회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인지 사탄의 아들에서 주님의 아들로 변신한 때문인지 그도 아니라면 잠깐 머리가 돌아서 그런지 알 수 없다. ( 이 장면과 함께 기억나는 다른 장면 하나는 말괄량이 소피아( 오프라 윈프리)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대책을 묻는 전처 아들의 하소연에 셀리가 한 말이다. '그러면 때려'.)

어쨌든 자매는 그야말로 극적으로 재회한다. 팔려갔던 그녀의 아이들도 만난다. 이보다 더 해피 할 수 있을까.

감독은 왜 이런 결말을 만들어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상황을 연출했을까. 상을 바라고 너무 욕심을 낸 것 아니냐는 질문은 나중에 스필버그를 만나면 하도록 하고 일단은 자매의 행복한 순간에 동참하자.

그러기 위해 언니와 동생처럼 손뼉을 부딪칠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마침 코스모스도 만개했다면 그 속에 들어가 마주 보고 손뼉치기를 해 보자. 그러면 그녀들처럼 행복이 과하게 몰려올 것이다.

‘쎄쎄쎄’로 불렀던 그 놀이를 필자도 기억하고 있다. 반달 동요를 부르면서 위아래로 손과 손등을 마주쳤던 유년의 추억이 이 영화로 되살아났다.

국가: 미국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출연: 우피 골드버그, 대니 글로버. 오프라 윈프리

평점:

: 여자고 흑인이고 못생겼고 가난하고 거기다 배운 게 없다면 그녀의 인생은 보나 마나다.

한두 개 결점이 아니고 모든 결점을 다 가진 셀리. 하지만 마음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였다. 이름하여 바보 천사.

그녀의 인생을 어찌 비극으로 마무리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야무진 감독이라고 해도 그럴 수 없다. 셀리의 인생을 보면서 1900년대 흑인 여자들이 받았던 차별과 노예적 삶이 시야를 흐린다.

같은 흑인이면서, 같은 약자이면서 자신보다 더 약자를 괴롭히는 장면에서는 분노보다는 인간말종에 회한이 가득 찬다.

우리도 그런 경험을 숱하게 했고 지금도 주변에서 그런 일들이 심심찮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미국영화라기보다는 한국에서 만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들판에 핀 코스모스도 그렇고 ‘쎄쎄쎄’도 그렇고 편지로 소통했던 방식도 그렇다.

마침 계절도 가을이지 않은가. 심어 놓은 코스코스가 바람에 흔들리고 어린 자매의 웃음소리가 동네를 들썩이는 듯하다.

전처 아들의 부인 말하자면 셀리의 며느리로 등장하는 말괄량이 오프라 윈프리의 볼만한 연기를 감상하는 재미가 글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 눈에 선하다. 

여운을 좀 더 즐기고 싶다면 영혼의 깊은 곳을 울리는 냇 킹 콜 버전의 재즈 ‘러브’나 어니언스의 ‘편지’를 들어도 좋다.

마무리는 언제 어느 곳에서도 어울리는 감성 충만한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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