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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03 17:58 (일)
화가 난 정태는 아무 말 없이 지게를 지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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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난 정태는 아무 말 없이 지게를 지고 돌아갔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1.08.03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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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일은 밤늦은 시간까지 계속됐다. 어떤 날은 횃불을 들고 야간작업을 하기도 했다. 너무도 바쁘고 힘든 나날이었다.

그러나 모든 시작한 일에는 마무리가 있기 마련이다. 수확도 끝났다. 이제 조금 쉴 만한 시간이다.

마침 내일이 오일장이다. 용순은 천웅 장으로 나갈 채비를 한다. 모처럼 장 구경도 하고 별러 왔던 것을 사야 한다.

빨아서 예쁜 옷을 입었다. 작은 양산도 챙겼다. 이 모든 것을 성일은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 시골 아낙이 어여쁜 여인으로 변신했다.

나도 갈래. 장에.

그 말을 하면서 성일이 입맛을 다신 것은 설탕이 듬뿍 들어간 호떡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호떡 하나라면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있었다.

연 같은 것은 시시했다. 그깟 것 하늘 높이 날린다고 해서 무엇이 좋은가. 성일은 이 순간 온통 장날의 시끌벅적함과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펼쳐진 온갖 물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벌써 네 번째 성일은 나도 갈래, 장에를 외치고 있으나 용순은 가타부타 말이 없다. 데리고 갈지 말지 결정이 서지 않았기 때문인지 이미 마음속에는 결론을 내려서 인지 알 길이 없었다.

성일은 마침내 자신의 특기인 울기를 시작했다. 코를 훌쩍이고 눈물을 찍어냈다. 급기야 앙하고 고함을 질렀다. 용순이 툇마루를 나서며 한마디 했다.

그 꼴로 장에 갈래.

추석이 낼모레다. 늘 낼모레라고 외쳤으나 실상은 사흘 남았다. 그래서 오늘이 명절 전 마지막 장이다. 한마디로 대목장이 서는 것이다.

설처럼 추석 대목은 용순에게 연중 가장 큰 행차였다. 식구들 옷을 한 벌씩 사줘야 한다. 정태는 물론 자신을 위해서도 아껴둔 돈을 쓸 참이다.

미리 무엇을 얼마에 살 것인지는 머리에 다 들여 놓았다. 그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사고 국밥을 먹고 성일에게 호떡을 사줄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하나 먹고 나머지는 싸서 집에 있는 다른 자식들에게 맛을 보일 참이다.

마늘 농사를 짓는 용순은 지게에 일찍 스무 접도 넘는 것을 실려 보냈다. 논농사가 정태의 몫이라면 밭농사는 용순이 책임졌다. 그래서 자신이 수확한 마늘을 떠나보낼 때 무언가 했다는 자부심으로 용순은 뿌듯했다.

살림에 밭일까지 하는 용순이 오늘 하루만큼은 쓰고 싶은 돈을 써도 된다고 자신에게 위안을 보낸 것은 이런 마음 때문이었다.

요새 마늘 금이 좋아서 값을 넉넉히 받을 것이다. 거기다 용순의 마늘은 육쪽마늘이라 상인들이 선호했다. 해마다 마늘종을 열심히 뽑아 실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마늘밑이 잘 들고 뽑은 종으로는 반찬도 해 먹는데 용순이 그것을 게을리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몸이 피곤해도 종이 나올 무렵이면 용순은 밭에서 살다시피 했다.

바구니 가득 마늘종이 차면 그것을 잽싸게 간장에 담아 마늘종을 만든다. 나머지는 지지고 볶아서 반찬으로 내는데 건강식이 이만한 것으로 따로 없다.

그래서 마늘종이 한 뼘 정도 올라오면 용순의 손은 더 빠진다. 논에는 발을 담가본 적이 없는 용순이지만 밭에는 살다시피 했다. 거기서 반찬이 나오기 때문이다.

논은 일 년에 한 번 밥을 주지만 밭은 매끼를 해결해 주니 용순처럼 철두철미한 사람에게 밭은 논보다 더 값지다.

돈으로 따지면 비교할 수 없으나 용순에게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논 아닌 밭이다. 그런 용순을 보면서 정태는 밭은 아예 용순에게 맡겨 버렸다.

마늘을 심고 캐고 새끼를 꼬아 접을 만들 때만 정태는 밭에 갔다. 그 마늘을 지게에 한가득 싣고 정태는 장에 먼저 도착했다. 그러나 오늘 정태는 마늘 값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용순이 그 값 아래로는 팔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장사꾼 한마디에 속아서 팔아넘겼다.

천서에서 오후에서 수천 접이 들어온다. 그러면 값이 폭락한다. 그러기 전에 어서 팔아라. 나니까 이런 말해주는 거다.

정태는 천서라면 여기서 30리 거리라 달구지를 끌고 새벽에 출발했다면 오전장에 충분히 당도할 거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눈앞이 깜깜했다. 시골 장에 수천 접의 마늘이 쌓이면 장꾼 말이 아니라도 시세가 똥값이 되는 것은 뻔한 이치였다.

그는 속아서 제값을 받지 못한 것은 알지 못하고 팔아서 돈이 된 것만 감지 덕지 했다. 연신 고맙다는 말을 했고 장꾼은 나머지도 있으면 다른 사람 말고 자신에게 넘기라고 선심쓰듯이 말했다.

운도 좋아 마늘도 팔았겠다, 이제 제 할 일을 마친 정태는 미리 이발을 하고 용순이 오기를 기다렸다. 성일이 먼저 아버지를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태는 받은 돈을 용순에게 내밀었다. 얼굴에는 만족한 웃음기가 감돌았다. 그 상태로 그는 장꾼과 자신 사이에서 오간 말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용순에게 전했다.

용순의 눈이 위로 올라갔다. 다듬은 머리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속으로 이런 머저리하고 생각한 것이 하마터면 입 밖으로 나올 뻔해 용순은 얼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정태를 끌고 상인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돈을 던져 주고 마늘을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놀란 상인은 엉거주춤하고 있다가 정태에게 했던 말을 용순에게 되풀이했다. 그러나 용순은 물러서지 않았다.

빨리 내 마늘 달라고 아우성쳤다. 재미를 봤다 싶었던 상인은 용순의 기세에 눌려 연신 아주머니, 아주머니 하면서 허리를 굽히다가 용순의 손에 지전 몇 장을 얹어 주었다. 그러면서 정태를 보았는데 그 눈은 여기서 끝내고 어서 데리고 가라는 눈치였다.

용순은 그것도 턱없이 부족했으나 더 따지다가는 정태가 장날에 망신을 당할 것 같아 그대로 흥정을 마무리 지었다.

화가 난 정태는 자신이 잘못한 것을 후회하기 전에 아녀자가 너무 설쳤고 그래서 자신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 것에 대해 분노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빈 지게를 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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