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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29 13:17 (금)
별은 땅 가까이 내려와 성일의 머리 위에서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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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땅 가까이 내려와 성일의 머리 위에서 놀았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1.07.26 14: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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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영영 사라지고 나서 정태네 식구들은 하루 만에 일상으로 돌아왔다. 애도의 기간은 짧았다.

식구들 누구도 그녀의 죽음을 얘기하지 않았고 그의 부재는 금세 잊혀졌다.

죽음을 앞두고 일 년 전부터 할머니가 했던 역할은 식구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도움은커녕 도움을 줘야 하는 형편이었다. 말하자면 할머니는 존중받아야 할 대상에서 멀어졌다. 그것을 그녀가 모를리 없었고 그래서 그녀의 죽음은 쓸쓸했다.

그녀는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기로 했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고 한 집에서 나 이사 한번 없이 그 집에서 죽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남편과 자식과 손주들의 관계도 잘 마무리했다.

아쉬운 것은 눈이 보이지 않아 성일에게 기댄 것이 두고 두고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엄마처럼 따르다가 어느 순간 멀어져 가는 녀석을 볼 때 할머니는 이제 내가 떠나야 할 때라는 것을 알았다.

불러도 대답이 없고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때까지 사는 것은 인간의 존엄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죽는 날을 정해 놓고 그렇게 갔다.

그날까지만 살면 더는 생의 의미를 두지 않겠다고 작정한 날 바로 그날 할머니는 이승의 끈을 놓았다. 더 늦어졌다면 노망났다고 여기저기 소문났을 것이고 그것은 가족에서 엄청난 부담이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노망은 산 자들을 죽게 만드는 죽어가는 자의 돌이킬 수 없는 부채였다. 정신을 완전히 놓기 전에 그녀는 그렇게 떠났다.

그래서 용순은 그것이 고마웠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감당하기 힘든 용순과 그래도 해주기를 바라는 정태 사이에서 큰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마침 갈등 직전에 숙제는 깨끗하게 끝났다.

할머니의 부재를 식구들 누구도 입에 꺼내지 않았다. 3년 상이니 하는 말들은 다 부질없었다. 이제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세상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그것도 표나지 않게 연착륙이 필요했다.

그러나 용순은 밝은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30년을 모셨다. 그만하면 할 만큼 했다. 그녀는 시어머니 방을 정리했고 이불을 빨았다. 쓸만한 옷은 기워 입거나 헤진 부분은 꿰맸다. 그러고도 남는 천은 가위로 잘라 따로 모았다. 그녀는 알뜰한 살림꾼이었다.

정태는 그렇게 시어머니를 대하는 용순의 태도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지만 그만한 며느리도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두 사람은 더 열심히 일했다. 성일은 더 많이 놀기 위해 저녁 늦게까지 들어오지 않았고 저녁을 먹고도 놀자 하는 기척 소리만 나면 담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렇게 녹초가 되도록 놀았으니 한 번 자면 중간에 깨는 법이 없었다. 제대로 잠을 잔 그의 몸은 늘어지고 있었고 금세 용순보다 훌쩍 커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성일은 자다 잠을 깼고 소변을 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할머니의 죽음 후 두 달이 지난 어느 겨울날이었다.

하늘은 맑았고 별들은 사방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리듯이 별은 땅 가까이 내려왔고 성일은 그런 별을 보고 마치 처음 보는 풍경 대하듯이 놀라워했다.

지금껏 저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펄쩍 뛰면 손으로 잡을 수도 있을 만큼 별들은 머리 위에서 놀았다.

그는 문고리를 잡다가 다시 뒤돌아 그런 풍경을 한 번 더 감상했다. 성일은 다시 잠이 들었다. 그 잠 속에서 할머니가 나타났다.

할머니는 하늘의 별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끝이 없이 이어지다 소금장수까지 오게 됐다.

소금을 지고 언덕에 올라 이마의 흐른 땀을 닦는 소금장수가 별처럼 선명하게 다가왔다. 할머니는 지게에 있는 소금을 다 사서는 성일에게 지워주었다.

그는 그것을 매고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왔고 용순에게 엄마, 할머니가 소금 샀다고 자랑했다. 잠에서 깼을 때 성일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할머니가 꿈에 나타났다고 하자 용순은 네가 할머니가 그리웠나 보다 하고 지나가는 말을 했다. 그것은 아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성일은 한 번도 할머니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할머니가 들려주었던 숱한 옛날이야기들이 그의 머릿속에 꽉 차 있음을 알았다.

할머니 빨리 죽어 버려, 하고 소리쳤던 기억과 함께.

그 말에 할머니는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까. 마지막 생을 보내며 축하 속에서 사라져도 모자랄 텐데 한때는 그렇게 따르고 좋아했던 손자의 소리가 귀에 박혔을 때 할머니는 마지막 남은 생의 줄을 스스로 놓기 시작했다.

이제 광산김씨의 역할은 끝난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 무대를 내려오기로 작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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