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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9 17:22 (금)
초가집을 때리는 빗소리처럼 되레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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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을 때리는 빗소리처럼 되레 기분이 좋았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1.07.23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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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를 생각하면 할머니가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 일찍 떠난 할아버지를 대신해 할머니는 갖은 수난을 겪었다. 고생 끝에 낙이 와야 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할머니는 내내 낙은 없고 징글징글한 삶을 살았다. 그 힘으로 가족을 건사했으나 이제 늙고 기운이 빠졌다. 보살핌을 바라지 않았으나 눈이 멀고 거동이 불편 하자 모든 것은 달라졌다.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자식들은 소홀할 수밖에 없었고 할머니는 그것이 서운했다. 그것은 채워지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비워져만 갔다.

자식은 물론 손주들도 그렇다 보니 할머니는 그러려니 했으나 그것이 세상 이치라는 것을 알았으니 더 늦기 전에 그런 세상을 등지기로 했다.

더 갈 수 없을 지경이면 내다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러면 자신보다는 자식들이 힘들 거라고 떠나는 마당에도 자식들 걱정을 했다.

할머니의 죽음은 그런 면에서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눈이 멀고 정신이 아늑하기 전에 미리 떠났더라면 좋은 기억만 남았을 것이다. 성일에게도 마찬가지다.

세숫물을 떠달라거나 뒷간을 갈 때 부축하는 번거로움은 어린 그의 기억에서 있어서는 남이 보는 것과는 달랐다. 사촌들은 효손이라고 말했으나 정작 그는 그런 소리을 들을 때마다 고집 센 아이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이제 겨우 7살의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었다. 할 수 없이 할머니는 그를 기댔다. 다른 손주들은 앞 못보는 할머니를 놀렸다.

정태는 슬픔이 복받쳤다. 어떻게 키웠는데 저러나 싶었다. 그렇다고 그가 시중을 들 수는 없었다.

네 명이나 되는 자식을 먹여 살리려면 먼동이 트면 나가고 어두워 져서야 들어왔다. 들어와서는 문안 인사드리고 잠에 곯아떨어졌다. 매번 같은 식이었다.

정태의 짐을 대신 진 성일은 그런 짐을 지기 싫어 할머니가 찾아도 어떤 때는 못 들은 척하고 밖으로 도망 나가 버렸다.

용순도 없고 집안이 적막에 휩싸이면 할머니는 무슨 말인가를 했고 그때마다 이가 없어 홀쭉해진 입술만 움찔거렸다. 가기 직전의 노인 모습이 영락없다.

동네 사람들은 만나면 어르신 괜찮으시냐고 묻는 게 인사였다.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느냐는 다른 말이었다. 그러면서 장수라고 추어올렸다.

그 말이 어떤 때는 듣기 싫었다. 칭찬이 아닌 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할머니의 나이는 83세였다. 보통 60 근방에서 죽는 것에 비하면 살아도 너무 오래 살았다. 아침에 눈 뜬 것이 복이 아니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어떤 때는 깨어났으나 일부러 눈을 감았다. 눈을 뜬다고 해서 보이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있는 것이 편하기도 했다.

오래 사는 것은 할머니에게도 자식들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는 할아버지 곁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아마도 손사래 치면서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저승에서 다른 여자와 살지 않는다면 말이다.

같이 산 시간은 길 못했어도 나름대로 정이 있었다. 부부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닌가. 천방지축으로 살면서 있는 재산 다 날렸어도 할머니가 바라는 사람은 한 사람, 할아버지뿐이었다.

광산 김씨는 오래 떨어져서 얼굴도 희미한 그를 만나러 가기로한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연지곤지 찍고 꽃가마 타고 오던 때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가마는 이번이 두 번째다. 그때는 살려고 왔고 지금은 죽으러 가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죽는 것, 그렇다. 오늘이 그날이다. 며칠 전 만 해도 고픈 배 때문에 부엌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거나 김이 나는 냄새를 맡으면 저것들이 내 밥은 안 챙긴다고 화를 냈다.

하루 세 번 먹어도 늘 배가 고팠고 수시로 먹을 것을 달라고 인기척이 들리면 소리를 질렀다.

이제 할머니는 더는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녀는 세상에 태어난 후로 처음으로 떠날 것을 확실히 결심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사람들이 모두 잠든 틈을 타서 눈을 꾹 감았고 더는 뜨지 않았다.

그가 눈을 감을 때 여러 사람이 어른거렸으나 확실히 떠올라 머릿속에 둔 사람은 없었다. 자식은 물론 신랑까지도 흐릿한 형상뿐이었다.

할아버지를 만나러 간다는 기분도 잠시였고 이내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녀는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다만 조금 설렜던 것은 아들이 사준 삼베 옷이었다. 새 옷이라 감촉이 좋았다.

그녀는 상여 속에서 그것을 만지작거리면서 저승길에 누추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사로잡혔다. 깨끗한 옷을 입었으니 만나는 사람 누구라도 손가락질은 못 할 것이다. 화장도 마쳤으니 고운 얼굴이다.

그녀는 잠시 또 기분이 좋았고 그 기분은 땅속으로 들어가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보드라운 흙이 쏟아져 내릴 때 초가집을 때리는 빗소리처럼 되레 포근하고 따뜻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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