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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일은 여기를 벗어나서 어디든 달려나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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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일은 여기를 벗어나서 어디든 달려나가고 싶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1.07.19 0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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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다시 불어 왔다. 땅으로 쳐졌던 울긋불긋한 천 조각들이 다시 수평선과 나란히 섰다. 시들었던 모가 시원한 소나기 한 방으로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처럼 바람은 비의 역할을 했다.

대나무에 매달린 만장의 처음과 끝이 일직선으로 가고 있다. 마치 진군하는 병사들처럼 앞으로 쭉쭉 뻗어 나아간다. 적진이 코앞이라도 되는 듯이 기세가 거셌다. 애초 그랬다는 듯이 만장과 바람은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이제 다 왔으니 쉬는 대신 계속 가는 일만 남았다. 바람의 기세도 죽지 않고 있다. 이런 날에는 연을 날려야 한다. 연을 날려야 하는 날이 있다면 바로 오늘이다.

성일은 만장을 쳐다보다 연 자세를 들고 달려나가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몸은 어느새 달려나가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얼레를 잡지 않은 손은 줄을 잡고 연신 앞으로 채고 있다. 문 고기를 낚는 것과 같은 빠르고 순간적인 동작이다.

성일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행동을 하다 번뜩 정신이 들었다. 다시 자세를 바로 한 그는 지팡이를 집고 곡을 하는 정태와 용순을 보았다.

그도 그들을 흉내 내면서 몸이 어느 새 거기에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상여꾼들이 자연스러운 것은 늘 그것을 해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일은 자신의 몸과는 달리 돌담 아래서 놀자는 친구들의 소리를 들은 듯  귓전이 근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마음은 장지가 아닌 콩밭에 있었다.

하염없이 따라가기만 하는 이 일을 당장 멈추고 싶었다. 혼나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더 참아야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한다.

걷는 일도 노랫소리도 지쳤다. 아니 이제는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완전히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조금은 호기심이 남아 있었다.

슬퍼서 죽을 것 같다가도 어느새 평온한 얼굴로 돌아오고 다시 깊은 슬픔에 빠지는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보는 것도 괜찮았다. 어떤 때는 금방 울었다가 금방 얼굴이 펴지기도 해 성일은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다.

슬픔은 오래가고 기쁨으로 바뀔 때는 어떤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어른들은 그런 것 없이 바로 건너뛰었다.

울다가 웃으면 똥구멍에 털이 난다는 말은 말짱 거짓말인가 보다. 조금의 어색한 표정도 없이 그렇게 바뀌고도 어른 들은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그런 표정을 살펴보면서 성일은 틈틈이 손을 앞으로 채면서 이제 막 보이기 시작한 장지를 넘어 보았다. 한쪽으로 비켜 고개를 빼고 보자 한 300 미터는 더 가야 할 듯싶었다.

벌써 한나절이 다 가고 있다. 남들은 가까운 곳에 묻는다는데 우리 할머니는 왜 그렇게 먼 곳으로 가는지 성일은 그것이 불만이었다.

놀 때는 단박에 가는 곳이었지만 오늘 따라 가다 쉬다 가다 쉬다 하면서 가는 길이니 질릴 만도 했다. 더군다나 그 길은 마음대로 빨리 갈 수도 느리게 갈 수도 없었다.

상여를 앞지르는 것은 불손한 행동이었다. 성일은 다리도 아프고 몸도 뻣뻣하게 굳어 오는 것을 느꼈다. 할머니의 손자라서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너무 싫었다.

주변의 눈치만 아니라면 만사 제쳐 놓고 달려나가고 싶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참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달리 어찌할 수 없으니 더 그랬다.

그러니 얼른 상여가 선산에 도착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슬픈 표정은 불만으로 찌그러지고 있었다.

억지로 슬픈 표정을 짓는 것도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여기를 한시바삐 벗어나서 어디든 달려나가고 싶었다.

마침 바람도 아래서 위로 불고 있다. 하필 이런 날이 할머니 장삿날이라니. 아직 겨울도 아니어서 연을 날리는 것은 예의도 모르는 아이처럼 어른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일이었다.

그러나 꼭 연을 겨울에만 날리라는 법은 없다. 그것을 동네에서 처음으로 깬 것이 성일이었다. 성일 이전에는 누구도 겨울이 오기 전에 연을 날리는 아이는 없었다.

처음에 성일이 여름이 끝날 무렵 연을 들고 나가자 정태는 정색을 하고 말렸다. 세상 물정 모른다는 투였다.

용순 역시 연을 여름에 날리는 애가 어디 있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연은 음력 초하루에 시작해 정월 대보름까지만 하는 놀이였다.

그날 이전이나 이후에 연을 날리면 부정을 타는 일이었다. 태워 버리거나 날려버리지 않는다면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 놓아야 했다.

용순이 손을 저어 말렸으나 빠르게 달려나가는 성일을 잡을 수는 없었다.

길에서 만난 동네 어른은 손에 든 연을 보고 설마 날리기 위해 들고 있는 것은 아닐 거라는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 보았다. 그러나 그날 성일은 보란 듯이 연을 하늘 높이 올렸다.

나이론 줄이 연 자세에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줄을 다 풀었고 연은 그만큼 하늘 높이 떠 있었다. 눈이 오지 않고 얼음이 얼지 않아도 연을 띄울 수 있다는 사실을 동네 아이들은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그리고 그들은 따라 하기 시작했다.

연을 새로 만들거나 작년의 연을 다락방에서 꺼내와 하나둘 연을 들고 들판을 달리기 시작했다.

좋은 것은 누가 말려도 그러하기 마련이다. 성일은 손이 또 근질근질했다. 한 손은 자세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줄을 잡고 채는 시늉을 다시 시작했다.

일이 끝나면 원 없이 연을 날리리라. 아이들이 다 가고 나서도 적어도 한 시간은 더 연을 날리겠다고 작정했다. 들판을 달리는 일은 그 어떤 것보다도 신나는 일이었다. 달릴수록 연은 자꾸 위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연을 보면서 성일은 더 빨리 달렸다. 간혹 논두덩이 걸려 자빠지는 일이 있어도 달리는 일을 멈춘 적은 없었다. 털고 일어나서는 더 빨리 달렸다.

그러면 연은 기다렸다는 더 위로 치솟았다. 연줄은 길게 포물선을 그리는 대신 각을 이루면서 고개를 들면 바로 눈 위에서 원을 그렸다.

까만 점으로 보일 만큼 높이 올라가서야 성일은 다리던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오늘이 가장 많이 올라간 날이다.

그만큼 세게 달렸고 바람도 제때 불어왔다. 늘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연을 날릴 때마다 성일은 지금이 어제보다 더 높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자꾸 달려나가려는 발을 제자리로 돌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치고 귀찮아서 한 발자국도 떼기 어렵다고 여겼는데 연을 생각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발걸음이 가벼웠다. 터벅터벅 걷던 걸음에 탄력이 붙는다.

충분히 쉰 사람이 다시 걸을 때처럼 몸도 깃털처럼 날렵했다. 이런 상태라면 달리기 시합에서 뒤따라오는 아이들을 멀찍이 떼어 놓을 수 있겠다.

하지만 일은 요란하고 어른들은 모여 있고 친척들은 슬픈 눈을 하고 있어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러자 조금 부끄러웠다. 그런 말을 비록 속으로나마 한 자신이 철없다는 생각에 성일은 슬픈 척 다시 정태를 따라 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곧 그치고 성일은 연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바람을 탈 수 있도록 줄을 잡은 손을 연신 앞으로 낚아챘다.

이제는 그 짓을 안 하면 이상할 정도였다. 연신 챔질을 하면서 성일은 연이 어느 정도 높이 올랐는지 가늠하기 위해 눈을 들었다.

하늘은 파랗고 구름 한 점 없었다. 뭉게구름조차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바람의 영향이었다.

그 사이로 잠자리들이 빠르게 날기 시작했다. 한두 마리 보이던 것이 이제는 떼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위로 솟구치다 옆으로 가고 다시 아래로 곤두박질치면서 그것들은 이제 자신의 시간이 왔음을 세상에 알렸다.

어떤 놈들은 상여에 앉기도 하고 또 어떤 놈은 흔들리는 만장을 지탱하는 대나무에 편히 기대어 쉬고 있었다.

꼬리의 빨간 부분이 눈에 선명히 들어오자 성일은 그것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아까부터 눈짓을 주던 정태가 이제 그만하라는 듯이 몸을 쓰면서 눈치를 주었다.

까불던 손을 멈춘 성일은 놓친 잠자리가 아쉬웠다. 연을 날리고 잠자리를 잡고 할 일이 많았다. 그런 일을 다 제쳐 놓고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이 성일은 귀찮은 마음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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