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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2-12-08 02:35 (목)
들판의 곡식이 노랗게 익어가는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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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의 곡식이 노랗게 익어가는 가을이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1.06.08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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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옆눈으로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성일은 피 흘리는 간을 생각했다. 간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돼지는 죽었으나 간은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런 간을 들고 사람들은 먹음직스러운 군침을 흘렸다. 막걸리를 급하게 털어 넣은 것은 그것을 빨리 먹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꿀꺽꿀꺽 목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채 가시기 전에 팽팽하게 긴장된 간이 입속으로 들어갔다.

손에 있는 붉은 것이 그보다 더 붉은 피를 흘리며 새빨간 입속으로 들어갈 때 사람들의 입은 양옆으로 길게 찢어졌다.

만족하다는 표시였다. 입맛 다시는 소리와 소금 찍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손을 쭉 뻗는 모습을 성일을 지켜보았다.

저것이 저리도 맛있을까.

성일은 조금 전까지 살아서 꽥꽥, 하고 소리를 길게 내지르던 돼지를 생각했다. 불쌍하기보다는 순식간에 벌어진 삶과 죽음이 어리둥절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88세에 돌아가셨다.

조선 시대는 물론 일제 강점기를 지나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를 기억했다. 그 길고 험난하고 때로는 웃음 지었을 여정이 이제 완전히 끝났다. 태어났던 흙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것이 서러운지 정태는 지팡이를 짚을 때마다 흐느꼈다. 그 모습이 낯설었다. 저렇게까지 슬픈 일인가 싶었다.

그러다가 누군가 다가가 말을 건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표정을 바꾸고 이러 저러하다는 듯이 설명을 했다.

귓속말을 하다가도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면 큰 소리로 말해 뒤따르던 성일이 그 말을 알아듣기도 했다.

보름 후에는 벼를 베야 한다. 정태가 그걸 모를 리 없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논에 가는 그에게 벼가 어떻다는 것은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았다.

그래도 농군들은 어제 했던 말을 오늘 또 했고 오전에 했던 말을 오후에 되풀이했다. 할 말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다짐을 서로에게 하기 위해서였다.

들판의 곡식이 노랗게 익어가는 가을이었다.

가다가 상여는 자주 멈췄다.

상여꾼들이 앞으로 나아갈 듯하면서 뒤로 밀려났다. 그들은 밀려난 자리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사이에도 상여는 앞뒤로 조금씩 흔들렸다. 상여꾼들이 손을 앞뒤로 밀면서 가볍게 상여를 움직이고 있었다.

이때 상주들이 바로 나서지 않으면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잣돈을 내야지.

그러면 깜박 잊었던 것이 생각난 듯이 정태는 가슴팍을 뒤져 돈을 들이밀었다.

그 돈은 상여를 맨 헝겊 조각 사이에 끼워졌다. 간혹 바람에 날리면 누군가가 잽싸게 달려들어 이번에는 더 단단히 집어넣었다.

그때도 상여는 가던 길을 멈추고 앞뒤로 왔다 갔다 했다. 잔잔한 파도가 앞으로 뒤로 밀려나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고요했고 너무나 자연스러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리어 이상하게 보였다.

꾼들의 곡소리는 일정한 음정으로 가볍게 울렸다. 간혹 상주의 곡소리가 적으면 방울을 흔들면서 흥을 돋구듯이 큰 울림의 곡소리를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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