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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구는 마을 앞 미루나무 앞에서 내내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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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구는 마을 앞 미루나무 앞에서 내내 기다렸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1.05.10 16: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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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골마을은 산주면에서 10리 이상 떨어져 있었으나 행정구역상 그곳에 속해 있었다. 거리로만 치면 천웅면 죽골이라고 해야 맞다.

거기다 이용하는 빈도도 산주면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아 죽골마을 사람들은 산주면에 주소를 두고 있으면서도 천웅면에 더 가까웠다.

정서적으로도 그랬다. 천웅은 산주에 비해 규모나 인구나 교통편에서 훨씬 앞서 있었다.

그곳에는 병원이나 약방도 있었고 서점에서는 만화책도 팔았다.

2일과 7일인 5일 장은 여러 마을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살림에 필요한 것은 대개 자급자족이 됐어도 옷가지며 제삿날 차림은 장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죽골마을은 다른 시골 마을처럼 늘 쪼들렸고 농사일은 고됐다. 소작농들은 한 해 벌어 한 해 쓰기 바빴다. 반면에 지주는 풍족했다. 그들은 1960년 까지도 머슴을 두고 있었다.

그 마을 사람들은 머슴처럼 대개 착하고 순박했다. 30여 가구 이씨네 씨족들은 간혹 타지인이 들어와도 모른 체 하지 않았다.

텃세를 부리기보다는 오죽하면 이곳까지 왔을까 걱정해 주었다. 얼마나 어려웠으면, 하는 동정심이 일었다. 죽골마을은 인심에 비해 살기에 넉넉한 곳은 아니었다.

천구네 집은 뒷산이라고 부르는 야트막한 야산의 날갯죽지 부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앞에는 렴주산이 제법 높이 솟아 있었다. 주변에서 제일 높았으나 고작 300미터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도 집에서 산을 보면 커다란 것이 어떤 장벽처럼 굳건히 버티고 있어 무언가 결심을 하거나 마음을 다잡을 때는 렴주산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집에서 삼대째 살고 있다고 천구 아버지는 말했다. 무사 출신으로 중앙정부에서 쫓겨나 시골에 정착했다는 설도 있고 문인으로 당파싸움을 피해 왔다는 말도 있었다.

천구 아버지도 그들의 조상이 이곳에 정착한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알았어도 말 못 할 무슨 사정 때문에 비밀에 부쳤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천구네는 양반 출신임을 내세웠으나 늘 초라했다. 그러나 이씨 왕족 양녕대군의 몇 대손이라고 천구에게 말할 때 아버지의 눈은 빛났다.

비록 형편은 이 지경이지만 상놈과는 다르다는 것을 아버지는 자랑스러워했다. 왕족이니 양반이니 하는 것이 천구가 보기에는 소 풀 뜯어 먹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왕족이 이렇게 살지는 않을 것이다. 하인은 없더라도 적어도 하인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천구는 그런 속내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만히 따져 보면 나쁜 것도 아니었다. 신분이 높은 것은 낮은 것보다 나쁠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러려니 했다.

천구네 집은 초가지붕으로 엮은 세 깐 짜리 토방집이었다. 그중 한 칸은 부엌으로 사용했다. 두 칸 방에서 여섯 식구가 살았다.

소집은 대문 옆에 있었다. 목수의 손을 거쳤다기보다는 아무나 얼기설기 엮어서 소가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만든 척 보기에도 무척 허술했다.

몰락한 양반네의 전형적인 모습이 있다면 이곳이 딱 맞을 성싶었다. 그러나 천구 아버지는 양반의 자부심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도 양반처럼 지체 높고 형편도 피기를 바랐다. 그래서 부지런히 일했다. 어떤 때는 머슴보다 더 열심히 땅을 팠다.

그 덕분이었는지 천구가 태어났을 때는 소작농은 겨우 면한 상태였다. 정태 부인 용순도 부지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절약 정신도 대단했다.

무엇하나 함부로 버리는 일이 없었다. 한 번 산 것은 헤어질 때까지 입고 헤어지면 기워 입었으므로 옷을 사는데 드는 돈은 거의 들지 않았다.

자식들은 차례로 물려 입었고 어쩌다 추석이나 설 같은 대명절에 겨우 바지 하나를 살 정도였다. 그러니 조금씩이나마 돈은 모였고 그 돈으로 정태는 술을 먹고 허세를 떠는 대신 모두 저금했다.

겨울철에는 집주변에 있는 대를 이용해 조리를 만들었다. 쌀을 일굴 때 조리는 도시나 농촌이나 필수품이었다.

손재주가 있었던 정태는 밤늦게까지 복조리를 만들었다. 대의 날카로운 가시에 손을 찔리고 피를 보는 일이 잦았어도 농한기에 쌀 한 말이나 사서 먹을 수 있는 조리 만드는 일은 중요했다.

밤새 정태가 만든 조리는 용순이 이고 지고 천웅으로 나가 팔았다. 운 좋은 장날에는 하나도 남김없이 다 팔고 왔다. 그런 날에는 천구에게 줄 호떡을 사왔다.

천구는 마을 앞 미루나무 앞에서 내내 기다렸다가 어스름 무렵에 오는 엄마를 마중 나갔고 손에 든 호떡 종이를 들고 집으로 달렸다.

그때 옆에 있던 황구도 덩달아 천구를 따라갔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용순은 흐뭇했다.

스물셋 조막만 한 나이에 그보다 다섯 살 많은 정태를 만나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이런 모습에는 작은 행복이 밀려왔다.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황가네 논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렸으나 다음 해 천구네는 논 대신 밭을 하나 장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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