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6975 2077203
최종편집 2024-03-29 00:50 (금)
그것은 스펀지처럼 조용하나 깊숙이 파고들었다
상태바
그것은 스펀지처럼 조용하나 깊숙이 파고들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1.04.26 14: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는 지금 제대로 자기 길을 가고 있는가. 성일은 이런 의문을 품었다. 잘못 들어온 엉뚱한 길이 아닌지 조심스러웠다.

조금 전의 상황과는 다른, 슬픔의 극한에 다다랐다는 생각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스펀지처럼 조용하나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 모든 것은 울고 난 직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막힌 것이 뚫어졌는지 답답한 숨구멍에 바람이 불어 들었다.

한두 방울 비가 내려 쌓인 먼지 위에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막힌 둑을 타고 내려올 정도는 아니었다. 세찬 소나기가 한바탕 쏟아져야 했다.

역부족인 것을 알면서도 이것만도 어디인가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한 두 방울 후두둑 내리다 보면 어느새 떨어지는 소리는 점차 커져 나중에는 빗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성일은 두 귀를 손으로 잡고 그런 소리가 들리는지 가늠했다. 절규의 함성 대신 조용히 속으로 삭이는데 집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힘은 절규 대신 고요함으로 찾아왔다. 함성 대신 맥빠진 심장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절대자를 살려내라던 허공 속의 외침은 더는 밖으로 울려 나오지 않았다.

골목길을 다 빠져나오자 닫혔던 것들이 한꺼번에 열리기 시작했다. 안 보이던 것이 눈에 들어오고 귀도 제자리를 찾았다.

도로를 가득 채운 출근길 버스 소음이 굉장했다. 모든 것은 어제와 다름없었다. 세상은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 가고 있었다.

버스의 웅웅 거리는 디젤 엔진의 단순한 기계음은 슬픔에 빠져 나락에 떨어졌던 성일을 다시 살려 놓았다. 정신이 조금 든 성일이 제일 먼저 한 것은 죽은 자의 환영이었다.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자연스럽게 생전의 그 모습이 어른 거렸다. 그 음성과 그 걸음걸이가 점차 눈앞에서 생생하게 살아났다.

언제나 단정한 그가, 무표정한 그가 웃음 대신 살짝 인상을 썼다. 성일을 바라보는 눈길은 인자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금 무서웠지만 성일은 용기를 내 한 걸음 그를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숨바꼭질하듯 전봇대 뒤에 숨었는지 순식간에 사라졌다.

성일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몸을 옆으로 돌려 멀리 있는 전봇대 주변을 살폈다. 혹시 그 뒤에 그가 있는 것은 아닌지 두리번 거리면서 살폈으나 사람의 그림자는 없었다.

아마도 그는 화려하고 위엄있고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랬을 것이다. 환영은 이제 없다. 그러나 성일의 마음 속에는 그가 다시 꿈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는 예전의 보통사람이 아닌 모습으로 성일 앞에 섰다. 그때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는 자신을 한 번도 신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신으로 여겼다. 신을 믿는 사람들은 신은 아니었어도 신과 인간의 경계에 있는 반신반인인 것은 확실하다고 믿었다.

그것은 그가 나이를 먹어도 젊은 시절의 늘 그 모습 그대로인 사실로 뒷받침됐다. 환갑이 지났어도 여전히 건장했으며 텔레비전 속의 눈빛은 언제나 흔들림이 없었다.

그것을 사람들은 좋은 것으로 반겼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인정머리 없다고 일부러 멀어졌겠지만 그는 그런 위험 조차도 사랑받았다.

그 위엄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중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그는 나라를 지켰고 국민을 구해냈다.

말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다고 했고 글을 쓰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게 적었다. 그렇지 않다는 극소수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그 후 그들의 존재를 알거나 물어보는 사람조차 없었다. 이단들은 존재했으나 존재하지 않는 존재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