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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광화사(1935)-천재 화가의 광기와 예술의 허용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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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광화사(1935)-천재 화가의 광기와 예술의 허용범위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1.03.18 17: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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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는 ‘인간 세상은 얼굴이 지배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서구는 물론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조선 세종 시대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그런 시대에 코는 질병 자루, 눈은 통방울, 귀는 반죽, 입은 나발통을 갖고 태어난 사내는 미보다는 추다.

거기다 얼굴 전체는 두꺼비 피부처럼 울퉁불퉁하다. 유복자로 태어났고 어머니도 일찍 죽었다. 이 아이의 인생은 보지 않아도 험난하다.

16살에 결혼했으나 날이 새자 신부는 도망갔고 재혼했으나 역시 다음날 신부는 또 도망을 쳤다.

김동인의 <광화사>에 나오는 솔거가 바로 그 인물이다. ( 김동인에 따르면 솔거라는 이름은 귀찮아서 그렇게 지었다. 신라 시대 솔거가 그린 노송도는 실제 소나무와 흡사해 새들이 서로 앉으려고 아우성쳤다는 전설이 있다.)

이럭저럭 솔거의 나이 50대로 중늙은이 신세다. 세상을 피해 산속 오두막에 산지 하세월이다. 그나마 재주가 있어 그림을 그리면서 세상을 향한 울분을 삭인다. 그런데 어느 날 만족스럽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산수화니 나무니 지팡이 든 노인이나 피리 부는 목동도 이제 신물이 났다. 상인의 간특한 얼굴, 행인의 무표정, 나무꾼의 싱거운 얼굴 말고 표정이 살아 있는 인물을 그리고 싶다.

문득 미인이었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뚜렷한 형상은 없지만 언 듯 언 듯 비치는 그 모습이 진짜 그가 그려야 할 일생의 작업이다.

동경과 애무로 그윽이 빛나는 커다란 눈, 나타났다 사라지는 입가에 떠도는 미소를 가진 천상의 얼굴 말이다.

솔거는 붓끝에 힘을 준다. 긴장한 얼굴이 더욱 일그러진다. 오기가 번득이고 그때마다 백지 위에 하나씩 형체가 드러난다.

기필코 완성하리라. 필생의 역작이 탄생하는 날 오십 평생 홀로 살게 버려둔 박정한 세상을 비웃어 주리라. 예쁜 척하는 세상 여자와 그런 여자를 천하일색으로 알고 사는 못난 사내들을 깔보아 주리라.

그러나 모델 없이 그리는 것은 어렵다. 사방팔방으로 찾아다녀도 미인을 구할 길이 없다. 그러던 또 어느 날 북악 심산의 깊은 계곡에서 한 여인이 느닷없이 나타났다. 범 내려오듯 바위에 내려앉았다.

▲ 화가 솔거는 앞 못보는 소녀를 통해 그가 궁극적으로 그리려고 했던 천상의 모습을 발견한다.
▲ 화가 솔거는 앞 못보는 소녀를 통해 그가 궁극적으로 그리려고 했던 천상의 모습을 발견한다.

무악재를 넘어온 석양을 받으며 흐르는 냇물을 보고 있는 열여덟 소녀. 다가가 보니 그가 찾던 천상의 미녀다. 용궁 속 세상이 아닌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녀는 앞을 보지 못한다. 솔거는 쾌재를 부른다. 실로 얼마 만인가.

새도 곤충도 짝이 있는데 홀로 살던 솔거는 그림도 그리고 다른 흑심도 품는다. 처녀 역시 그와 궁합이 맞으려는지 저녁이 늦은 것도 상관없고 부모의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고 응수한다. 둘은 오두막으로 스며든다.

솔거는 붓을 든다. 그리고 용궁에서 여의주를 구해 그녀의 눈을 떠 주겠다고 한다. 순간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녀는 앞이 보이는 것과 같은 황홀한 표정을 짓는다.

바로 저 모습이다. 솔거의 붓놀림이 거침없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밥 아저씨’는 저리 가라다. 수년 동안 몸통만 있고 얼굴이 없던 그림에 드디어 생기가 입힌다.

목과 얼굴이 몸통에 얹어지자 화공은 한 시름 놓았다. 이제 눈만 그리면 된다. 화룡점정의 시간은 다가온다.

그 순간 긴장이 풀린다. 그는 붓 대신 소녀를 잡고 하룻밤 꿈 속을 헤맨다. 눈동자 하나쯤은 내일 그려도 될 것이다.

다음날 솔거는 마지막 점을 찍기 위해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는 어젯밤 용궁을 꿈꾸던 그런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24살 풍신 좋은 사내를 그리는 사랑의 욕망으로 가득 찬 모습이다.

그는 여러 번 어제와 같은 표정을 지어보라고 다그치지만 이미 남자의 사랑을 알아 버린 여자는 그런 표정을 짓지 못하고 화가 난 솔거는 그녀를 잡고 흔들고 따귀를 때리다 마침내 목을 잡고 누른다.

숨이 끊긴 그녀는 쓰러지면서 벼루를 뒤집고 벼루 속의 먹물어 튀어 눈동자에 박혔다. 그림은 저절로 완성됐다.

만약 이라는 가정은 의미 없지만 만약 솔거가 추물이 아니라 미남이었다면 그의 인생은 어땠을까. 

임금의 용안을 그리는 궁궐화가로 명성을 떨쳤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 놈의 얼굴 타령이 솔거를 살인자로 만들고 죄없는 여자를 죽게 만들었다. 

: 청운동 통인시장 쪽으로 올라가면 곧 인왕산이다. 얼마 걷지 않아 도시의 기운은 사라지고 계곡이 나온다. 거기서 곧장 몇 걸음 올라가면 깨끗한 계곡물이 흐르고 세월을 알 수 없는 바위가 반긴다.

아름드리 나무와 이름모를 새와 온갖 식물들이 지천으로 널렸다.

이런 풍경에 감탄한 김동인은 세계 어디에서도 이런 도시가 없다고 서울(당시 경성)을 찬양했다.

비록 그곳이 이조 오 백 년 동안 음모와 배신으로 점철됐더라도.( 코로나 19가 잠잠해 지면 시장에서 잡채로 요기하고 수성동 계곡을 통해 인왕산 정상을 오르고 싶다. 그러면서 광기에 사로잡힌 솔거와 그의 모델이었고 사랑의 대상이었다가 죽임을 당한 소녀를 추억하고 싶다.)

불과 반 시간 만에 혼잡을 벗어나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천만 인구로 커버린 지금도 마찬가지다. 넓은 돌에 앉아 앞 못보는 소녀가 솔거를 맞는 장면을 떠올리면 인생은 무상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듯 하다. 

더 높이 올라가면 암 굴이 있고 솔거가 은신한 오두막이 나오고 더 올라가면 무악재를 넘어온 해질 무렵 풍광도 감상할 수 있고 몸을 돌리면 임금이 사는 경복궁도 볼 수 있다.

이런 것을 빼면 김동인의 소설은 소설 그 자체다. 그도 허구인 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면서 결말을 어떻게 내릴지 고심한다. 그냥 평범하고 행복하게 결말을 내릴지 아니면 말지 그도 아니면 어떤 비극적인 결말을 낼지 망설이다가 기왕이면 비극을 택했다.

그는 비운의 주인공을 등장시켜 예술가의 혼이 이 정도다, 그러니 독자들은 이 정도는 이해해 주고 그래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예술가는 예술을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해도 이해되고 용서되고 그래야 진정한 예술이 탄생 된다는 그의 탐미주의는 또 다른 작품 <광염소나타>에서 확연하게 나타난다.

"천년에 한 번 날지 못날지 모를 큰 천재가 몇 개의 변변치 않은 범죄를 구실로 세상에서 없이 하여 버린다 하는 것은 더 큰 죄악" 이라거나 "있으나 없으나 한 쓸데없는 목숨보다는 위대한 음악이 더 소중하다"고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그의 탐미가 어느 정도 인지 짐작이 간다.

그런가 하면 이광수의 교화주의에 반발해 극단적 예술지상주의의 작품을 썼다는 견해도 있다. 그렇다 해도, 저렇다해도 독자들에게 극단적 가치관을 강요할 수는 없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도 아무리 뛰어난 예술작품도 도덕보다 앞에 설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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