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를 위반해 발생한 교통사고가 국민건강보험법에 규정된 보험급여 제한 사유인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한 범죄행위에 그 원인이 있거나 고의로 사고를 일으킨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은 최근 A씨가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부당 이득금 환수 고지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되돌려 보냈다.
A씨는 오토바이를 운전하던 중 정지신호를 위반해 직진, 교차로에 진입했다가 신호에 따라 좌회전을 하던 피해 차량을 발견, 멈추려 했지만 그러지 못하고 차량을 들이받아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교통사고처리 특례법’ 제3조 제2항 단서 제1호, 제4조 제1항 단서 제1호는 운전자가 교통신호나 지시를 위반해 업무상과실치상죄 또는 중과실치상죄 등을 범한 경우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거나 교통사고를 일으킨 차가 자동차 종합보험 등에 가입된 경우라도 공소를 제기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건보공단은 국민건강보험법 제53조 제1항 제1호에 ‘보험급여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한 범죄행위에 그 원인이 있거나 고의로 사고를 일으킨 경우에는 보험급여를 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한 것을 이유로 A씨에게 요양급여비용에 대해 부당이득징수 처분을 내렸다.
이에 불복한 A씨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서울고등법원은 “A씨는 교통신호를 위반한 채 교차로에 진입한 과실로 발생한 교통사고로 부상을 입어 치료(요양급여)를 받았다”며 “건보공단은 A씨의 부상이 ‘중대한 과실로 인한 범죄행위에 원인이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A씨에게 요양급여비용 상당액에 관해 부당이득징수 처분을 한 것은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해당 사건은 대법원으로 넘겨졌고, 대법원은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되돌려 보냈다.
대법원은 먼저, 지난 2003년 대법원 판례를 인용했다.
당시 대법원은 “국민건강보험법은 국민의 질병ㆍ부상에 대한 예방ㆍ진단ㆍ치료ㆍ재활과 출산ㆍ사망 및 건강증진에 대하여 보험급여를 실시함으로써 국민보건 향상과 사회보장 증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며 “국민건강보험 제도는 국가공동체가 구성원인 국민에게 제공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안전망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이어 “국민건강보험법의 입법목적과 국민건강보험 제도의 특성을 고려하면, 국민건강보험급여 제한사유 중 ‘중대한 과실’이라는 요건은 되도록 엄격하게 해석ㆍ적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과거 판례를 인용한 대법원은 “‘교통사고처리 특례법’ 제3조 제2항 단서 제1호, 제4조 제1항 단서 제1호는 운전자가 교통신호나 지시를 위반하여 업무상과실치상죄 또는 중과실치상죄 등을 범한 경우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거나 교통사고를 일으킨 차가 자동차 종합보험 등에가입된 경우라도 공소를 제기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대법원은 “해당 규정은 일상생활에 자동차 운전이 필수적으로 됐음을 고려해 운전자에게 피해자와 합의나 종합보험 등의 가입을 유도, 교통사고로 인한 피해의 신속한 회복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라며 “업무상과실치상죄 등을 범한 운전자에 합의나 종합보험 등의 가입이 있으면 공소를 제기하지 않는 특례를 부여하되, 교통신호 위반 등의 경우에는 예외로 인정, 교통신호 준수 등을 운전 시 지켜야 할 중대한 의무로 정했다”고 전했다.
대법원은 “교통사고처리 특례법 관계 규정의 입법취지는 국민건강보험급여 제한사유를 정한 국민건강보험법의 입법취지와 다르다”며 “교통신호를 위반해 운전하다가 사고를 야기했다는 사정만으로 국민건강보험급여 제한사유에 해당한다고 단정해선 안 된다. 사고가 발생한 경위와 양상, 사고 발생 당시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 판단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이와 함께 대법원은 “이 사건 교통사고의 경위에 비추어 보면 A씨에게 교통신호를 위반한 과실이 있으나, 당시 순간적인 집중력 저하나 판단착오로 교통신호를 위반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이 사건 교통사고와 그로 인한 A씨의 부상이 ‘중대한 과실’로 인한 범죄행위에 그 원인이 있는 경우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이어, “원심은 이 사건 교통사고와 그로 인한 A씨의 부상이 ‘중대한 과실’로 인한 범죄행위에 그 원인이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며 “원심 판단에는 국민건강보험법상 보험급여 제한사유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아 판결 결과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