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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탁류(1937)- 해방 전후 시대의 ‘복수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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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탁류(1937)- 해방 전후 시대의 ‘복수혈전’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1.01.26 15: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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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은 여러 번 가본 적이 있다. 고향 보령과 가깝기도 하고 서양식건물에 대한 미련이 자꾸 그쪽으로 곁눈질하게 만들었다.

한석규와 심은하 주연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 나왔던 초원 사진관이 바로 거기에 있어 군산의 매력을 한 층 더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군산 하면 채만식의 <탁류>다. 초봉이가 살던 집이며 승재가 일했던 병원이며 제호의 약방이 있던 곳이 군산이다.

정주사가 미두 장사로 곤욕을 치른 곳이며 행원 고태수가 횡령을 일삼고 탑삭부리 한참봉의 싸전가게가 손님을 맞던 곳이다.

불어오는 해풍을 맞으며 빵을 사 먹고 일본인이 버리고 도망간 이층집을 구경하다가도 문득 <탁류>의 한 장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곤 한다.

아마 올해도 군산을 한두 번 더 갈 듯싶다. 이번에는 또 그 의미가 색다를 것이다. 독후감을 끄적이고 났으니 감회가 어찌 새롭지 않겠는가.

작품에 빠져들수록 슬픈 기운으로 몸이 쪼그라든다. 초봉이의 운명이 너무 잔인하고 복수의 광기가 살벌하기 때문이다.

21세 꽃다운 나이에 초봉이는 탁류의 거센 물살에 휩쓸려 사라졌다. 금강을 떠나 서해 바다로 나가 태평양 깊은 심연으로 굴러떨어졌다.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가난을 핑계로 정주사와 유씨 부인의 파렴치함이 그렇게 만들었다.

▲ 군산바닥 아니 식민지 조선을 통틀어도 초봉이의 인생은 남달리 불행했다. 더는 살 수 없는 막장에서 그녀는 드디어 일을 저지른다. 힘을 짜내 복수 혈전을 벌이는 그녀의 영혼이 지하에서 나마 평안하기를 기원해 본다.
▲ 군산바닥 아니 식민지 조선을 통틀어도 초봉이의 인생은 남달리 불행했다. 더는 살 수 없는 막장에서 그녀는 드디어 일을 저지른다. 힘을 짜내 복수 혈전을 벌이는 그녀의 영혼이 지하에서 나마 평안하기를 기원해 본다.

횡령의 막장에 선 고태수의 신부가 된 초봉이는 혼사 후 한 달 새에 무려 세 명의 사내를 거치는 험난한 생을 시작한다.

그 시작은 곧 끝을 의미하지만 그 세월은 하도 길어 한 달이 10년하고도 비교될 만하다.

태수의 친구 형보는 참한 신부 초봉이를 노렸다. 간사하기가 이를데 없는 형보의 그물에 태수가 걸려들었다. 초봉이와 혼인하기 전 싸전 집 김씨 부인과 정을 통했던 태수의 약점을 한참봉이 알도록 찌밀한 작전을 짰다.

참봉은 정사 현장에서 부인과 태수를 문경새재 박달나무로 만든 홍두깨로 작살을 냈다. 그 날 형보는 신혼 열흘째를 맞는 초봉이를 겁탈했다.

초봉이는 지긋지긋한 군산바닥을 떠나 서울행을 굳히고 조촐하게 짐을 싼다.

그때 서울 가면 비빌 언덕으로 삼으려고 했던 아버지 정주사 친구 제호를 만나 유성온천에서 자의반 타의반 몸을 맡긴다.

제중당 약방을 정리한 약제사 제호는 서울에서 제약회사를 차렸다. 별거에 들어간 부인 윤희 대신 제호는 초봉이를 첩으로 삼았다.

첩 살림은 그런대로 괜찮아 매달 시골로 제호의 돈이 전달됐고 정주사는 작은 가게를 차렸다. 그 사이 초봉이 딸 송희를 낳았다.

그런데 그 딸은 태수 혹은 형보 아니면 제호의 씨인지 알 수가 없다. 한 달 사이에 일이 벌어졌으므로 초봉이도 남자 대신 자신을 닮은 딸인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다.

오로지 송희에게 매달린 초봉이는 제호와 서먹서먹한 관계가 되고 기회를 봐서 따돌릴 생각을 하고 있던 제호 앞에 형보가 나타난다.

그는 딸이 자신의 자식이라고 주장면서 태수가 죽을 때 초봉이를 자신이 맡아 달라고 유언했다고 제호에게 떠벌인다.

그렇지 않아도 떼어낼 기회만 엿보던 제호는 잘됐다 싶어 슬그머니 뒤로 빠진다. 이제 초봉이는 제호 첩에서 형보의 정실부인이 됐다.

초봉이는 그 댓가로 형보에게 거액의 돈과 동생 계봉이를 서울로 불러들였다.

이렇게 해서 생각만해도 끔찍한 형보와 살을 맞대고 사는 초봉이의 또 다른 신산한 삶이 시작됐다.

그런데 형보의 욕심은 끝간데 없다. 백화점에 다니는 계봉이까지 넘본다. 자매를 차지하고도 남을 넘쳐나는 정력을 앞세워 노골적으로 계봉이를 어찌해 보려고 수작질이다.

초봉이의 인내가 한계에 다달았다.

군산 시절 제호의 약방에서 일했던 경험으로 극약으로 처치하려던 계획 대신 일단 발로 배꼽 아래 급소를 질러 쓰러트렸다. 그리고 맷돌을 들어 형보의 기형적인 몸을 평평하게 만든다.

당하고만 있던 초봉이가 드디어 일을 저질렀다. 끔찍한 살인의 주인공이 된 초봉이 앞에 그녀의 첫사랑 승재가 나타난다.

승재는 의사 시험에 합격해 아현동에 시민병원을 차리고 막 개업하는 순간이다. 승재 역시 초봉이를 잊지 못하고 있다.

: <탁류>는 문장의 탁월하다. 읽으면 읽을 수록 주인공의 심리 속으로 독자는 빨려 들어간다.

특히 초봉이를 놓고 벌이는 원색적인 남녀 애욕은 시종일관 긴장의 끈을 놓치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작품 전부를 관통하고 있는 힘은 가난한 식민지 조선의 아귀다툼이다.

살기 위해 남을 짓밟고 일어서려는 민초들의 험란한 인생이 보면 볼수록 짠하다.

그 가운데 압권은 일방적으로 희생만 당하는 초봉의의 삶이다. 군산 바닥 최고의 희생양인 초봉이는 그러나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만 하지 않고 막장에서 드디어 떨쳐 일어났다. 그 과정의 생생한 아픔을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여 낸 채만식의 구성은 그래서 더욱 빛을 발한다.

초봉이를 매개로 정주사 가족은 가난을 벗어났다. 제호와 형보는 욕심을 채웠다. 방망이에 맞아 죽지 않았던들 자살이나 감옥행을 피할 수 없었던 태수 역시 그렇다.

여기서 주목할 인물이 승재다. 고아로 자란 그는 부처님이라고 해도 좋은 만 한 인성을 가졌다.

제 돈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지극 정성은 물론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야학을 하고 겨우 15살에 돈 이백 원에 팔려간 명님이를 기생집에서 빼낸다.

전북 옥구 출신의 채만식은 <탁류> 외에도 장편 <태평천하>를 써 해방 전후사에 있어 우리 문학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금강의 탁한 물이 아침 햇살을 받아 은비늘처럼 반짝거린다면 그것은 그의 묘사가 탁월하기 때문이다. 한편 채만식은 친일 작가로도 명성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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