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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5 14:57 (목)
360.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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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빛과 그림자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1.01.22 1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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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소개한 대만의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은 러닝타임이 세 시간이었다. 그런데 오늘 소개할 같은 감독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무려 네 시간이다.

지레 겁먹는 게 맞다. 시간이 아까운 사람은 보지 않아도 된다. <하나 그리고 둘>은 억지로라도 보라고 권한 바 있으나 이 영화는 그러고 싶지 않다.

네 시간은 어떤 사람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남는 것은 시간뿐이라는 사람이라면 어느 여름날 소년의 살인 사건 속으로 들어가 봐도 무방하다.

선택은 본인 몫이다. 코로나 블루를 넘어 코로나 레드라는 말까지 나오는 요즘에 영화는 심란한 마음을 부추 킬 수 있다. 영화를 영화로만 보기 어려운 작금의 시대를 한탄하면서 하 수상한 시절이 어서 가기만 바랄 뿐이다.

중2병 정도는 과거에도 있었다. 과거의 양아치 행동이나 1960년 대만의 양아치나 비슷한 행동을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샤오쓰(장첸)가 바로 상상아닌 현실의 그 중2 정도가 되겠다.

집안은 안정됐고 넉넉한 편이다. 중국 본토에서 대만으로 이주한 샤오쓰의 아버지는 교수이고 엄마는 현모양처이며 누나나 동생은 나름대로 자기 일에 몰두한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류층 가정이다.

그런데 부모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감에 빠져 있고 자녀들은 들떠 있으나 그것을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고 까지 말하기는 아직 이르다.

▲ 소년의 사랑은 진실됐고 절박했으나 소녀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소년이 소녀를 만난것은 불행이었으나 그 불행은 전적으로 소년만의 것이 아니라 불안한 사회가 만든 것이었다.
▲ 소년의 사랑은 진실됐고 절박했으나 소녀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소년이 소녀를 만난것은 불행이었으나 그 불행은 전적으로 소년만의 것이 아니라 불안한 사회가 만든 것이었다.

일제가 패망하고 떠난 대만 거리는 여전히 엔카가 흘러나오고 막 미국유행을 타고 엘비스 프레슬리와 서부극의 존 웨인이 인기를 끌고 있다.

샤오쓰는 주간부가 아니고 야간부 소속이다. 다른 성적은 좋으나 국어가 밀려서 그렇게 됐다. 아빠는 이리저리 손을 써 주간부로 옮기려 하나 잘되지 않는다.

야간부 학생들이 공부보다는 거칠게 노는 것에 익숙해 거기에 혹여 아들이 빠질까 염려스럽다. 그런 염려는 대개 맞아떨어진다.

샤오쓰는 젠체하는 아이들이 만든 불량 패거리에 어쩔 수 없이 끼게 되고 소공원 파와 217파는 서로 대립의 각을 세운다.

파가 있으면 두목이 있기 마련이다. 허니는 샤오쓰가 속한 소공원 파의 보스로 어느 날 사라졌다 다시 아이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해군복을 입고 있는데 217파는 호시탐탐 녀석 제거를 위해 모의를 한다.

여기서 소년의 여자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밍( 양정의)은 이미 허니의 여자다. 그런데 그 밍을 소년 샤오쓰가 사랑한다.

자 대략 이 정도면 이 영화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짐작이 갈 것이다. 소년이 나와서 소녀를 만났다.

소년과 소녀는 이해하고 사랑하는 감정이 남다르다. 그러나 소녀는 소년보다 앞서 준 사랑이 있다고 앞서 말했다.

이 즈음 허니는 교통사고를 가장한 상대방 보스의 계략으로 죽는다. 허니가 없는 세상에서 밍은 샤오쓰를 만나 아픔을 잊고 새로운 희망의 세계를 꿈꾸는 것처럼 보인다.

겉으로는 허니의 그림자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네 시간짜리 이야기를 여기에 다 옮길 수는 없다. 그럴 의도도 애초에 없었다. 장황하게 줄거리를 써 보려는 의욕도 생기지 않는다.

이제 밍은 없다.밍이 없는 세상에서 라디오 방송으로 불러 주는 샤오쓰의 주간부 합격 통보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희망은 사라지고 혼란한 사회는 여전하다.

그의 살인은 우발적이었을까. 아니면 치밀한 준비에 의한 계획적 살인이었을까. 양호실에서 다친 밍을 에스코트 하는 첫 만남의 숙명은 상처가 다 나았을 때 아예 더는 상처 받지 말라고 끝장을 내고야 만다.

훤한 대낮에 시작해 어둑해질 무렵 끝난 영화는 가벼운 발걸음 대신 고개를 숙이고 터벅터벅 걷게 만드는 무거운 침묵을 안겨 준다.

국가: 대만

감독: 에드워드 양

출연: 장첸, 양정의

평점:

: 화면이 길게 늘어지는 것은 관객에게 강요하기보다는 생각해 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가령 아들과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지 않고 끌고 가는 장면에서는 여기서 무슨 훈계조의 말이나 다투는 장면이 나오면 그것이 되레 이상할 것 같다.

짧고 빠른 화면은 이 영화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대신 어둠과 밝음만이 공존할 뿐이다. 빛과 그림자는 세상의 겉과 속이다.

<하나 그리고 둘>이 철저하게 관객을 의식했다면 이 영화는 관객보다는 감독 자신을 위해 만들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했다는 강한 의지가 작품 곳곳에 스며있다. 자신만의 작품을 자신의 의도대로 끌고 갔다.

심각한 학교 폭력이나 살인 장면 같은 것을 고민하지 않고 많은 장면 가운데 하나처럼 스쳐 지나가게 한 것 등이 이상하게 여운이 길다.

콘서트와 친구 간의 우정, 퇴학과 공부 같은 갖은 양념도 영화의 완성도를 높여 준다.

세상에는 재수 없는 일, 불공평한 일들이 너무 많고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 신념의 소녀에게 내가 평생 널 지켜 줄게 같은 소년의 말들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소년의 살인과 소녀의 죽음에 대해 교회의 십자가 아래서 작은누나는 그 모든 것을 이해했을까. 궁금증은 많을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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