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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이생규장전(15세기 중엽)-이팔청춘, 불꽃으로 타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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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이생규장전(15세기 중엽)-이팔청춘, 불꽃으로 타오르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0.11.27 09: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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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는 늘 ‘옛날 옛적에’로 시작한다. 이 이야기도 그렇다. 옛날 옛적에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지었는데 ‘이생규장전’은 그에 실린 다섯 편의 한문 소설 가운데 하나다.

한문 소설이니 나중에 우리말로 번역된 것을 읽었다. 우선 오래됐다고 해서 고리타분할 거라는 선입견이 있다면 멀리 던져 버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만큼 현대에 읽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고 되레 신선하면서 그러지 못한 현대인들이 좀 배워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만큼 세련됐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적극적인 여성의 모습이다. 뒤로 빼거나 점잖은 시늉 대신 앞으로 나서 자신의 의견을 숨기지 않는다.

대담하면서도 넘치는 자신감은 어디에서 왔는가. 아마도 그녀가 남자에 비해 전혀 모자라지 않다고 생각하는 배움으로 충만한 내면의 맷집 때문으로 분석된다.

사랑에 있어 그녀는 적극적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슬프고 괴기하고 처절하다. 가슴 뭉클하다는 표현으로는 턱 없이 부족하다.

두꺼운 고전 소설을 읽고 난 후 한동안 멍한 기분에 빠져든 것 같다. 남녀 간의 사랑이 매우 기묘하게 전개되고 있다.

시작은 지금의 선남선녀들과 비슷하다. 남자가 먼저 기웃거리고 이를 눈치챈 여성이 응대하는 패턴이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상황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제목에 등장하는 이생이 남자 주인공이다. 나이는 18살이고 김시습에 따르면 풍모가 맑고 자질이 뛰어나다. 공부도 열심이어서 길을 가면서도 늘 시를 읽고 짓는 일을 하였다.

그에 맞서는 여성 주인공은 최씨로( 당시는 여자 이름은 없고 성씨로만 불렸다. 이 점이 아쉽다. 최씨가 아닌 최미인 정도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역시 시에 능통했는데 나이는 이생보다 두어 살 아래로 자태가 아름답고 취미로 하는 수놓기가 일품이었다.

그런 최씨 집 앞을 지나다니던 이생은 어느 날( 대개 일은 어느 날로부터 시작된다) 담 안을 엿보게 되고 그곳에서 한 아름다운 여인이 수를 놓다가 잠시 지쳐 시를 짓는 장면을 보게 된다.

이생이 듣기에 매우 그럴싸하니 시라면 자신도 뽐낼 수 있어 답가로 쓴 시를 실로 매달아 담장 안으로 던져 넣었다( 이 얼마나 로멘틱한가. 지금 같으면 이런저런 죄가 되니 조심해야 한다).

자, 이제 다음 장면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독자들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시와 시가 부닥친다. 문장과 문장이 얽힌다. 예상대로다.

그 시는 남녀의 사랑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봄을 노래하기도 한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고 했던가. 둘은 서로 자신의 짝이 분명하다고 그 순간 결심한다.

선수는 이생이 쳤으나 진도는 앞서 말 한대로 최씨가 이끈다. 한 발 나선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부부가 되어 영원히 즐거움을 누리자고 손을 내민다. 그러면서 향기로운 술을 따라 권한다. 놀랍지 아니한가.

이생도 마다할 좀생이가 아니다. 말로도 하고 시로도 내심 기다리던 바이다, 고 자신의 속마음을 전한다. 참 운치 있다. 영화 속 한 장면도 이처럼 아름답지는 않으리라.

사랑을 나누기 위해 이생은 최씨가 이끄는 대로 무언가 꿈꾸기에 좋은 다락방으로 올라간다.

이팔청순이 만났으니 그 사랑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무려 며칠 간이나 지극한 사랑의 즐거움을 맛보는데 여기서 산통을 깨는 것은 이생이다.

그는 옛 성현의 말을 빌려 집에서 부모님이 기다리는데 아침, 저녁 문안 인사도 못 드렸으니 도리가 아니다, 하면서 분위기 깨는 소리를 지껄인다.

이에 최씨는 그를 놓아준다. 이생 부모는 그를 혼쭐 내고 영남 지방 울주로 농사 감독이나 하라고 쫓아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생은 왜 그런 사실을 최씨에게 알리지 않았을까, 알렸다면 최씨가 마음 졸일 일도 없으니 긴장감이 떨어지겠다거니 생각한 김시습이 그것까지 염두해 두고 소설을 썼다니 정말 대단하다) 최씨는 이생을 기다리다 몸저 누웠다.

최씨 부모도 이제 이생의 존재를 알게됐다. 그들이 서로 사랑을 함께 나눈 것도 ( 여기서 최씨는 남녀의 사랑에 대해 부모에게 과감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매실이 떨어진다거나 뽕나무 잎이 시든다거나 길가 이슬에 옷을 적셨다거나 덩굴이 나무에 의지한다거나 집안의 향을 훔쳤다거나 등 등의 표현으로 이생과의 관계를 알리는데 소설 속 이야기지만 최씨의 당당함이 눈앞에 선하다).

▲ 이생과 최씨의 사랑은 지고지순하다. 죽어서도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기괴하나 허황되지 않고 그럴수도 있겠다 싶은 만큼 이야기가 가지런하게 전개된다.
▲ 이생과 최씨의 사랑은 지고지순하다. 죽어서도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기괴하나 허황되지 않고 그럴수도 있겠다 싶은 만큼 이야기가 가지런하게 전개된다.

그러면서 그녀는 혹시 모를 일에 대해 쐐기를 박는다. 이생과 저승에서 노닐지언정 다른 가문으로는 맹세코 시집가지 않겠다고.

그 딸에 그 부모라고 그 말을 들은 부모는 딸의 마음을 이해하고 이생 집에 혼인하자고 의사를 묻는다.

처음에 이생 부모는 이런 저런 이유로 반대하다가 마음을 돌려 승낙하게 된다. 혼인이 결정되자 최씨의 병도 씻은 듯이 사라지고 둘은 이제 합법적인 부부가 되어 부부로써 칭송받는 양홍과 맹광, 포선과 환소군이 부러울 정도로 금슬이 좋았다.

계속 좋았으면 좋았을 것을 안되라고 그랬는지 신축년(1361년) 홍건적이 고려의 서울 개성을 점령했다. 임금은 복주로 도망을 갔고 홍건적은 집을 불태우고 최씨를 어찌 하려고 덤벼들었다.

이때 그러지 말았으면 좋았을 슬픈 일이 벌어졌다. 최씨는 정조를 지켰으나 난자당해 죽었다. 거친 들판에 숨어 겨우 목숨을 건졌던 이생이 돌아와 보니 모든 것은 끝난 뒤였다.

그는 눈물을 흘리고 길게 탄식했는데 이때는 시를 짓지 않았다.

이윽고 밤이 되었다. 그때 누군가 돌연 등장했으니 바로 죽은 줄 알았던 최씨다. 물론 최씨는 귀신으로 나타났으나 둘은 이승에서 그랬던 것처럼 산사람처럼 다시 사랑을 나누고 인생을 즐겼다.

그 다음 날 최씨와 이생은 숨겨둔 재물을 찾고 양가 부모를 예로써 장사 지냈다. 자식된 도리를 다하고 난 이생과 최씨 부부는 그렇게 또 몇 년을 보냈다.

이 몇 년 동안 이생은 인간사에 게을러 졌다. 비록 친척이나 손님의 길흉사가 있어도 조문하지 않고 문을 걸어 잠그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오로지 최씨와 사랑을 나누는 데만 온 정성을 쏟았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으면 어땠을까.

그러나 김시습은 해피앤딩을 원하지 않았다. 죽었다 다시 환생한 최씨를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다.

저승길의 운수는 정령 피할 수 없는가. 인간 세상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최씨는 더 이상 산 사람을 미혹 시킬 수 없다며 점차 희미해지는 듯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전에 이런 저런 시를 주고 받으면서 마지막 작별 인사는 해두었다해도 어찌 이별의 눈물을 밤새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최씨가 떠나고 이생은 다른 여자를 만나 또 다른 인생을 즐겼을까, 아니면 최씨를 따라 저세상으로 떠났을까.

서방님 부디 몸 건강하세요. 라던 최씨의 부탁을 마다하고 몸에 병이 생겨 시름시름 앓다가 몇 달 만에 최씨 있는 곳으로 달려갔을까.

어쨌든 이 소설의 마지막은 친절하다. 옛날이야기처럼 끝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저마다 애처로워하며 그들의 절의를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사랑에 정답은 없을 것이다.

서로 좋아하고 위로하고 이해하면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한 눈 팔지 않고 오로지 배필을 위해 검은 머리가 파 뿌리가 되도록 한평생 사는 것은 멋진 일이다.

얼마나 사랑이 깊으면 죽어서도 다시 살아날까. 무려 수 년을 산 사람처럼 그렇게 사랑하다가 끝내 떠날 때는 또 얼마나 슬프고 괴로울까.

먼저 떠난 사랑이 그리워 자신도 앓다가 그렇게 된다면 이 사랑은 해피앤딩 일까.

인연은 삼신할미가 점지해 준다고 하지만 이생과 최씨 같은 그런 인연이라면 전생이나 현생은 물론 다음 생에서도 이어지기를 기대해 볼 수 있겠다.

그들이 저승 다음 생에서도 사랑을 나누며 시를 짓고 주고 받는 모습은 보아서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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