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이번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스며들었다. 삶의 미련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여기서 대원들의 절반 이상을 잃을 것이다. 확률 50%는 매우 높은 게임이었다. 이 정도 확률이라면 소대장은 자신도 당연히 죽음의 인파 속에 끼어들 거라는 확신을 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향숙이와 약속한 다음번에 한 번 표충사에 더 오자, 는 약속을 지키지 못할 거라는 자책 때문이었다. 공포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지키지 못하는 약속은 자신 때문이 아니다. 내가 걸어갈 수 있는 다리가 없고 설사 있어도 조금씩 땅속으로 사라질 것이기에 없는 다리로 거기까지 갈 수는 없다.
소대장은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러자 어느 순간 마음은 착 가라앉았고 이마의 땀도 금 새 사라졌다.
약속이란 깨지기 마련이고 향숙이도 이런 사정을 알 것이다. 그러니 향숙이 혼자서 표충사에 들른다고 해서 미안할 필요 없다.
그는 손목을 들어 향숙이 표충사에서 사준 염주를 들어 올렸다. 염주는 새것이라 사람의 손때를 덜 묻어서 인지 표면이 조금 거칠었다.
그는 미안해하면서 그것을 받고는 오른손으로 잡고 엄지를 이용해 앞으로 하나씩 굴렸다.
어울려.
향숙이 말했다. 어울린다는 것은 스님에게나 통용되는 말이었다. 그런데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단단한 모감주나무로 만들었대.
향숙은 선물을 받고 멋쩍어하는 소대장에게 말을 이었다.
소대장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한다는 뜻인지 아니면 그렇지 않다는 말인지 아리송했다.
그런 순간을 기억한 소대장은 모감주나무의 잔해를 벗어 오른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습관처럼 몇 번 돌렸다. 지난번보다 익숙한 솜씨였다. 그러나 칭찬해 줄 향숙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염주를 굴리면서 보이지 않는 어떤 은공의 힘으로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나서 고지에 깃발을 꽂게 해달하고 빌었다. 깃발을 꽂는 다면 향숙과의 약속이 지켜 질 수 있다. 그는 간절했다.
그러나 부처님을 찾지 않았다. 하느님도 아니었다.
이런 기도는 양심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그는 양심을 꺼내 들었다. 적들도 나와 똑같은 부처님과 하느님을 추앙할 것인즉, 서로 적을 물리치게 해달라고 빈다면 신들은 매우 곤혹한 처지에 몰릴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만 염주를 돌리는 행위만 했을 뿐 입으로 중얼거리거나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것을 당장 그만두었다. 소대장은 대신 인공기가 물러난 자리를 차지한 태극기를 바라보며 애국가를 부르고 싶었다.
적들이 도망간 자리는 원래 주인에게 다시 돌려 줄 것을 믿었다. 원래 주인이라니. 도대체 원래는 언제를 말하는가.
그가 이런 망상을 이어갈 때 중대장은 대장을 불러 모았다. 긴 시간이 지난 줄 알았는데 소대장의 사색은 겨우 3분을 넘지 않았다.
중대장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소대장들은 그들이 공격해서 올라갈 지점을 각자 확인했다. 부챗살 펼치듯이 사방으로 나눠 공격 해야 승산이 더 높다고 중대장은 말했다.
그는 지난번 전투에서 자신이 직접 태극기를 올린 사실을 상기시켰다. 불과 3일 전이었다. 3일을 지키고 고지를 적에게 넘기고 뒤로 후퇴할 때 중대장은 넋이 빠진 사람처럼 기운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지키지 못하고 뒤로 후퇴해 대대장의 질책을 받았으나 대대장은 그를 후방으로 빼지 않고 다시 공격의 선진을 맡겼다. 그는 믿음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한번 해 본 사람이 두 번 하기는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