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고 몇 발자국을 가기도 했다. 눈을 떴을 때는 어림짐작한 거리와 방향이 한 참 다르게 나타나기도 했다. 그때마다 절의 모양과 그 모양을 싸고도는 산의 경치도 다르게 다가왔다.
다른 것은 같지 않았으므로 그는 변화한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는 마치 사색하는 사람이라도 된 양 아까보다 더 서서히 움직였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주변의 경치가 그를 압도했으나 그는 차분히 그것을 즐겼다. 작은 한 점에 불과한 왜소한 자신을 밤송이 떨어지듯이 툭하고 아래로 던졌다.
반항하는 대신 무엇이든 받아들이기로 작정하자 심연은 더 깊은 곳으로 떨어졌고 그의 상처도 조금씩 아물었다.
성처는 깊고 오래됐다. 고질병은 쉽게 치료되지 않는다. 죽을 때 까지 함께 가야한다. 그는 바짓가랑이를 걷고 무릎을 살폈다.
진물이 나던 정강이뼈의 물집이 아물기 시작했고 등에 난 좀쌀 같은 피부두드러기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럴 리야 있겠는가. 절 마당을 겨우 몇 바퀴 돌았다고 그런 기적은 생길 리가 없었다. 마음의 안정이 돋아나던 반점들을 피부 속으로 숨긴 것에 불과했다.
성을 내거나 어떤 욕심이 마음속을 어지럽히면 그것들은 다시 나타나서 그를 바쁘게 할 것이다. 발이며 손이며 몸에 닿는 것이라면 어디든 긁어서 기어이 피를 보고야 말 것이다.
의지에 따라 몸이 반응하자 소대장은 자신이 어쩌면 저 앞에 있는 산까지 움직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렇다고 그가 완전히 복수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가해자의 용서를 받지 못했는데 복수의 마음이 사라지면 그것은 인간의 심장이 아닌 새의 심장에 불과했다.
복수의 여부는 상대방의 용서 여부에 달렸다. 까마귀 몇 마리가 소리 없이 날았고 하늘 높은 곳에는 그보다 훨씬 크고 동작이 화려한 독수리 세 마리가 선회비행을 하고 있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번뇌가 있을까.
그는 복수도 용서도 없는 그런 어정쩡한 상태에 빠졌다. 무엇이 분명하지 않고 모호한 상태로 그의 마음을 남겨 두었는지 알지 못한다.
결단을 내리지 않은 것은 언제든 변심할 수 있다. 그는 그 상태가 지금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 임을 알았다. 복수하더라도 나중에, 용서하더라도 그다음에 해야 한다.
급한 것은 아니다. 두고두고 생각해서 악수를 두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에 그는 지금 그대로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문이 열리고 저쪽에서 향숙이 고개 대신 발부터 내밀었다.
하얀색 양말이 눈에 띄었다. 신발 속의 그것이 전혀 궁금하지 않았으나 그 순간부터 소대장은 다른 사람의 양말 색깔에 호기심이 일었다.
사람들은 어떤 근거와 기준으로 양말을 고르는지 하얀 양말이 빨간 구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몸을 돌리고 향숙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다가서자 향숙이 마주 보며 걸었다. 그녀는 미소를 살짝 미소 지었으나 눈가의 촉촉한 기운까지 지우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