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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9 17:22 (금)
젊은 시절의 한 가운데를 전쟁이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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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한 가운데를 전쟁이 관통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0.11.11 11: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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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이 소대장에게는 인생의 턴어라운드 지점이었다. 어떤 욕심이나 번뇌에서 벗어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는 삼촌에 대한 복수심보다는 전쟁을 우선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혼자서 그 일을 할 수는 없었지만 힘을 보태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는 나았다.

그런 생각을 그는 향숙이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완전히 잊기로 작정한 듯 유쾌하고 쾌활했다. 어떤 때는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웃고 떠들었다.

웃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미소였고 떠드는 것은 겨우 소대장의 귀에 들릴 정도였지만 그녀는 어두운 낯 색이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처음에 소대장은 너무하다 싶었다. 아버지를 처참하게 잃은 것이 불과 얼마나 됐다고 처음부터 아버지가 아예 없었던 사람처럼 그러나 싶었다.

나중에 생각하니 향숙이의 깊은 마음이 조금은 이해됐다. 되레 자신이 모자란 인간이었다는 것을 소대장이 깨달은 것은 한동안 안 보이던 그녀가 대웅전에 엎드려 어깨를 들썩였기 때문이다.

그가 먼 산의 경치에 넋을 잃고 있다가 돌아보니 향숙이 없었다. 어디로 갔는지 주변을 둘러보아도 없었고 화장실에 갔나 하는 생각으로 기다렸으나 돌아올 시간이 되도 나타나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그는 절간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혼자서 가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처음의 불안은 사라졌으나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그는 행방을 몰라 여전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문득 독경 소리가 들리는 대웅전을 주목했다. 아래쪽을 보지 않고 옆 쪽을 정면으로 보고 있는 대웅전을 기웃거리다 그는 거기 엎드려 있는 작은 그녀를 보았다.

서서 걸을 때 보다 그녀는 매우 작았는데 마치 어린 소녀 같았다. 일어섰다가 엎드릴 때 긴 생머리가 앞으로 쏠렸다. 그러나 향숙이는 머리를 쓸어 올리기보다는 내버려 두고 다시 일어섰다 엎드리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슬픔은 이곳에 두고 자신은 오로지 모든 것을 잊고 앞일만 생각하자고 다짐을 했다. 향숙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동안 소대장은 고개를 들고 단상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부처를 바라보았다.

저절로 합장을 하게 되는 그 모습은 어제나 오늘이나, 향숙이 오기 전이나 엎드려 절하는 지금이나 다를 바 없었으나 소대장은 시시각각으로 부처의 모습이 달리 보였다.

너무 엄숙하고 조용하고 경건하기에 그도 안으로 들어가 한쪽 구석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자신이 어떤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느낌이ㅣ 들어 얼른 고개를 바로 들었다.

숙이고 있다면 필시 빠져나오지 못할 수렁 속에 있을 것만 같았다. 눈도 떴다. 그러자 그는 삼촌을 죽인 자들을 용서할 수는 없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마음속으로는 잊었다고 외쳤지만 바로 원한이 솟구쳤다. 절하는 동안에도 수십 번 마음이 왔다 갔다 했다. 이랬다, 저랬다 변하는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밖으로 나왔다. 향숙은 그가 나가는 것을 알지 못했다. 물론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으니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밖으로 나온 그는 절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기와집과 그 기와집을 감싸고 있는 산들의 경치를 바라보았다.

저들은 알고 있을까.

마음속의 번뇌는 거듭 됐지만 부처 앞에서 엎드려 절할 때와는 달리 동요는 사라지고 매우 차분했다. 그는 죽고 사는 것은 사람의 뜻이 아닌 신의 영역에 속한다고 주절댔다.

자신이 태어난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총을 들기로 작정했던 것이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안전한 후방에서 생을 연장하는 것이나 전방 고지에서 죽는 것이나 죽음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더구나 후방이라고 해서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떤 불의의 사고가 살아 있는 그의 상태를 끝장낼지 몰랐다. 포탄이 쏟아지는 전방에서도 살아 돌아오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발걸음을 이리저리 옮기면서 그는 젊은 시절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기로 작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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