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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19 10:44 (화)
자신이 할 일은 교육이 아니라 전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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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할 일은 교육이 아니라 전선이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0.11.03 15: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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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저씨는 오래 도망가지 못했다. 십 여 미터 쯤 달려가다 잠깐 멈칫했다. 손이 등뒤에 있어 뛰기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 누군가 뒤에서 쏜 총이 등을 지나 가슴을 뚫고 앞으로 나갔다. 처음에는 무슨 일인가 당황했던 아저씨는 비로소 자신이 총을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비틀거리면서 땅바닥에 쓰러진 아저씨는 억울하다 외치고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그리고 또 무슨 말인가를 했으나 그가 하는 말을 알아 듣기 위해 그 옆으로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아저씨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나는 죄가 없다는 말이 됐다. 포승줄에 묶인 자들은 겁에 질렸다. 굳이 시범으로 내세우는 번거로움이 사라지자 둘러선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저절로 일이 풀린 것이 잘 됐다는 듯이 서로 눈짓을 했다.

아직 손이 묶이지 않은 자들은 감히 달아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자발적으로 손을 뒤로 돌려 묶기 좋게 했다. 그 와중에도 순순히 따르고 잘 보이면 쉽게 풀려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졌다.

삼촌도 그랬다. 군인들 틈에 경찰서에서 보았던 낯익은 형사도 눈에 띄었다. 반갑기도 하고 지푸라기라도 잡을 심산으로 삼촌은 아는 체를 했으나 그는 고개를 돌렸다.

묶기를 끝낸 군인들은 그들을 무릎 꿇리고 서너 발자국 뒤에서 총을 쏘았다. 그들은 지체하지 않았다. 시간이 없었다. 이 일이 끝나면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카가 서울서 내려왔어요.

삼촌은 형사를 향해 소리쳤으나 그 소리 전에 이미 총이 목 뒤를 관통해서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목구멍 근처에서 멈췄다. 삼촌은 운이 좋았다. 총알이 하필 목을 관통해 고통스럽게 죽지 않고 한 방에 갔다. 원 샷 원킬이었다.

삼촌처럼 바로 죽지 않은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소리 질렀다. 가까이서 총을 맞은 사람은 처음에는 모기에 물린 것처럼 따끔하다는 듯이 총알이 지나간 자리를 손으로 쳤다.

마치 모기를 잡으려는 듯란 시늉이었다. 그러다 손에 모기 대신 핏덩이가 묻은 것을 보고는 공포에 질려 총에 맞았다고 고함을 쳤다. 고함 소리는 삼 십 분을 넘지 않았다.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다니면서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머리쪽을 겨냥해 다시 총을 쏘았다. 귀찮은 일을 빨리 끝내야 겠다는 생각으로 그들은 쏘고 나서 이제는 됐다는 듯이 자리를 털었다.

장사를 끝낸 장꾼이 뒷정리를 하듯이 그들은 죽은 자들을 정리하지 않고 급하게 트럭을 타고 어디론가 떠났다.

삼촌 집에 와 있던 소대장은 삼촌이 끌려가던 날 사촌 여동생과 밀양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낚시에 걸려든 은어는 잘 세공된 은가락지보다도 더 반짝였다.

향숙이는 서울로 가고 싶어 했다. 자신도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고 아버지에게 말해 달라고 졸랐다. 일이 있어 2-3일 고향에 내려와 있던 소대장은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향숙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리고 저녁 무렵 그들이 집으로 돌아오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들렸다. 울부짖는 아낙네의 괴성은 길게 이어졌고 아이들은 그런 아낙 사이를 뛰어다녔다.

소대장과 향숙은 직감적으로 일이 터졌음을 알았다. 바로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어둠이 오기를 기다렸다. 망태기의 은어들은 벌써 죽어서 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땅에 버렸고 흙으로 덮었다.

상황 파악을 끝낸 소대장은 향숙이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는 집으로 가지 않고 곧바로 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운 좋게 살아남은 자들과 지서를 기습해 총을 탈취했다.

지리산은 넓고 커서 숨기에 적당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삼촌의 원수를 갚자고 했으나 무슨 수로 원수를 갚고 그 원수의 대상이 누구인지조차 불분명했다.

아무 경찰서나 습격해 총질을 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삼촌을 쏜 자와 쏘도록 명령한 자를 찾는 것도 어려웠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포성이 울렸고 점점 가까워졌다.

전선은 부산까지 밀렸다. 삼촌은 총을 버렸고 산을 내려와 바로 부산을 향해 걸었다. 막 대학에 입학했던 그는 피난 교육청을 찾아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사범대학 학생증도 보여줬다. 그들은 그러라고 했다. 처음에는 군을 피하기위해 선생질을 한다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그가 자원입대하겠다고 하자 그런 생각을 한 자들은 부끄러워하면서 전쟁은 군인이 하고 선생은 아이들을 지키라고 만류했다.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눌러 앉히려고 잡았으나 그는 고집을 부렸다. 소대장은 원수를 갚는 일은 뒤로 미뤄 두었다.

지금은 그것보다 위태로운 조국을 위해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찾는 것이 급했고 그 길은 교육이 아닌 바로 전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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