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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28 20:29 (목)
아침부터 확성기가 불이 나게 다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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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확성기가 불이 나게 다그쳤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0.11.02 14: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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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대장은 이곳이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옷에 맞지 않은 몸이 부대꼈다.

군화도 여전히 낯설었고 계급장 역시 그랬다. 손에 쥔 총은 무거웠고 권총은 거추장스러웠다. 불과 반년 만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삼촌은 아무 이유 없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됐다. 누가 추천했는지도 누가 적어 넣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는 사이에 도민증 대신 연맹증이 나왔다.

한 집 건너 한 명씩 가입했으니 무슨 일이야 있겠나 싶었다. 옆집 당숙은 비료를 공짜로 준다고 해서 연맹에 들어갔다.

정부는 연맹에 가입한 사람에 대해서는 잘못을 묻는대신 철저하게 신분을 보장한다고 안심시켰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좌익활동을 했거나 그 근처에 있던 사람이 아닌자들도 수두룩했다.

그 수가 무려 30만 명에 달한다고도 했고 그 보다 곱절이나 더 많다고도 했다. 그러나 정확한 숫자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평생 농사만 지어왔던 삼촌은 많은 사람이 참여한 것에 안심했다. 자발적으로 가입한 사람들은 지난날의 죄를 값고 싶었다.

한국전쟁이 터졌다. 경찰서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연맹원들은 차례로 경찰서 신세를 졌다.

삼촌 역시 사찰과 형사의 조사를 받았고 삼일 간 유치장 신세를 졌다. 앞으로 열심히 살겠다고 직인을 찍고 나서야 삼촌은 늦은 밤 풀려났다.

그러나 온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난 후였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걷는 것도 힘들어했다. 쌀가마 하나를 번쩍 들었던 힘은 숟가락 들때도 벌벌 떨렸다.

삼촌은 밀양의 한 경찰서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입에 다물었다. 자물쇠를 채우고 누가 물어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평소 안면이 있던 형사는 그를 곤죽을 내고는 서울서 학교 다니는 조카가 내려오면 즉시 알리라고 협박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총소리는 가까이 들렸고 인민군들이 바로 근처까지 몰려왔다. 국군은 아래로, 아래로 후퇴했다.

삼촌은 그날 다른 연맹원들과 함께 학교 운동장에 집합했다. 모이라고 아침부터 확성기가 불이나게 다그쳤다.

연맹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학교 운동장에 모이시오.

그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연맹증을 들고 하나둘 집합했다. 연맹증이 마치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이 그들은 그것을 챙겼다.

그러나 불안한 마음에 몸이 떨렸고 그 와중에도 설마 죽이기야 하겠느냐고 서로 안심시켰다. 겁 많은 일부는 모이는 척하다가 산으로 숨었다.

그들은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산에서 같은 옷을 입고 총을 멘 사람들이 모인 그들을 에워싸는 것을 보았다.

같은 옷을 입을 사람들은 미리 준비해온 포승줄로 연맹원들의 손을 뒤로 묶었다. 그때서야 위험을 느낀 아랫집 아저씨가 뒤뚱거리면서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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