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내가 어찌 잊겠는가. 아아 어찌 우리 잊으랴, 네 녀석을. 천수는 이를 갈았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부드득, 드드득 하는 재봉질 소리가 났다.
아니 기관총에서 뿜어져 나가는 총알의 탄두 질 소리였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흔히 마지막으로 내뱉는 발악하는 것과 같은 단말마였다.
누가 옆에서 그 소리를 들었더라면 심장이 강한 자라 할 지라도 한 발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 소리는 지상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땅속 깊은 지하에서 음산하게 터져 나오는 신음이었다.
그는 그런 소리를 한 번 더 내고는 이내 정신 줄을 놓았다. 손에서 잡았던 줄을 놓을 때 그는 몸뚱이가 떨어진다는 느낌이라기보다는 편안한 잠에 빠져드는 기분을 느꼈다. 마치 수면마취제에 취한 중독자처럼 기분좋게 그는 널부러졌다.
그가 다시 깨어났을 때 그는 고문실이 아닌 감방의 독방에 있었다. 죽은 줄 알고 방치했는데 이틀 후 꿈틀거려서 경찰서 유치장에 박아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도 한동안 기운을 못차려 그곳에서도 삼일을 그대로 더 있었다. 일주일 만에 그는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대전 형무소로 옮겨졌다.
비로서 그는 심문과 고문에서 해방 됐다는 것을 알았다. 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난 그는 군법 재판에 넘겨져 사형을 언도 받았다.
검사나 변호사는 형식적으로 참여했다. 누구도 사형 외에는 다른 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준엄한 재판관이 사형이라고 외치고는 방망이를 세 번 칠 때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포승줄에 묶인 그는 법정을 나오면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간도에서 보았던 흰 옷 입은 사람의 형상이 천수로 환생했다.
흰 옷이 유난히도 밝았는데 이런 깨끗한 옷을 입은 것이 얼마만인지 알지 못했다.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그래서 기억이 없었던 것이고 사형을 받으니 좋은 점은 이런 옷을 입어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매무새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가냘프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뼈대가 있고 키가 있어 보기에 그랬다. 시간이 있었다면 바짝 깎은 머리일망정 좌우로 고개를 돌리면서 얼굴의 모습도 관찰해 보고 싶었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간수는 멈칫 하는 그를 줄을 끌어 당겨 재촉했다. 자신의 영역으로 표시해둔 냄새를 맡기 위해 코를 벌름 거리는 강아지의 목줄을 잡차 채는 것과 같은 기분을 천수는 느꼈다.
그런 것이다. 포승줄에 묶인 그나 목줄에 끌리는 개나 처지가 틀리지 않았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는 법정을 뒤돌아 보았는데 그곳에는 간도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잠깐 만났던 토벌대장이 서 있었다.
그는 아는 체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볼 일 때문에 왔다가 우연히 마주 쳤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천수를 쳐다봤다. 피하는 듯 했고 미안한 감정이 스며 있는 듯도 했다.
일주일 만에 열린 이심과 그 삼 일 후에 열린 삼 심에서도 그는 같은 판결을 받았다. 천수는 형집행을 기다렸다. 온통 기다리는 그의 삶에서 이 때의 기다림 역시 다른 기다림과 다르지 않았다.
기다린 것이 오고 나면 왔구나, 올 것 왔으니 그리로 가자 하는 심정이었다. 달관이 아니라 삶의 애착이 그 어디에도 없었다.
두 어차례 형집행이 미뤄졌다. 그 이유를 천수는 알지 못했다. 간수도 언질이 없었다. 한 번은 그자가 면회를 왔다. 병태는 말했다.
죽기 전에 회개해라.
뜬금없는 소리였다.
하느님 믿어라.
그러면 죽어도 산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얼굴에 무언가가 닫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뱀이 기어가는 듯한 소름이 전신을 쓸고 지나갔다. 천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볍게 눈을 뜨고 낮익은 혹은 낮설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어릿한 시선사이로 군복이 보였고 그 사이로 대령 계급장이 또렷하게 보였다.
진급했구나, 축하한다.
다시 보게됐어, 안됐지만 말이야.
그가 군인다운 패기로 말했다.
그리고 잡은 얼굴을 아프지 않게 꼬집으면서 빨갱이가 자수 했으니 내가 무기로 감형해 줄게.
이 말을 하고 그는 잡은 얼굴을 놓지 않고 이번에는 조금 아프게 꼬집더니 위 아래로 흔들었다.
나는 애국자다.
너는 빨갱이다.
빨갱이라는 말을 할 때는 목소리가 제법 높았다. 저쪽에 있는 간수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그는 기다렸다가 간수가 다가오자 빨갱이에게 담배 한 대 줘라하고 품 속에서 담배 한 대를 꺼냈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담배를 끼고 천수는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담배를 입에 물고 혀를 깨물었다. 피가 조금 새어 나왔으나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쓰러져 깊은 잠을 잤다.
감옥안에서 그는 하루 종일 잠을 잤다. 자다 깨면 다시 잤고 깨면 다시 눈을 감았다. 이런 적이 없었다. 그는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전쟁 소식을 들었다. 이제 익숙해 질만한 감옥 생활이 1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이었다. 간수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의 운명도 시시각각으로 다가왔다.
끌려나가는 죄수들이 부르짖는 소리가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무슨 미련이 있다고 그들은 뒤를 돌아봤다. 반겨 줄 리 없는 싸늘한 감방안을 눈에 담아 두려는 듯 그들은 한결같이 그들이 끌려 나온 감방안을 살폈다.
그러나 그런 순간도 오래 가지 못했다. 간수들의 성화가 대단했다. 발로 차고 주먹으로 쳤다. 그들은 뒤뜰에 모였고 이어 탕 탕 탕 하는 소총 소리가 귀에 닿기도 전에 목을 땅쪽으로 꺾었다. 그런 소리가 하루 종일 울렸다.
감옥 문이 들락날락 할 때마다 이번에는 내 차례구나 했으나 왠일인지 천수는 하루를 버텨냈다. 간수의 실수인지 누군가 손을 썼는지 알 수 없었다.
천수에게 손을 쓸 사람이 없었으므로 간수의 실수가 분명했다. 폭탄 소리가 감방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게 들렸다. 간수들은 서둘러 감방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