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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환의 작은 눈이 뱀처럼 한 곳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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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환의 작은 눈이 뱀처럼 한 곳을 응시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0.10.05 11: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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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의 과정을 길게 설명하고 싶지 않다. 그럴 기회는 앞으로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을 뒤로 미룬 것은 지금 받고있는 고문의 고통이 너무 처절하기 때문이다.

여수 경찰서로 압송된 것은 자수 바로 다음 날이었다.

설 잠에서 깬 천수는 곧바로 일어나 서청 간부의 집으로 들이닥쳤고 그에게 자수하러 온 산 사람이라고 말했다. 반란의 주동자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예상대로 그자는 처음에는 놀랐으나 곧 평정을 되찾고 중학교 동창을 알아보았다.

천수야, 잘 왔다.

첫 마디치고는 괜찮은 말이었다. 둘은 손가락을 걸고 언약했다. 산속의 잔당들은 용서하고 자신만 정식 재판을 받고 처벌받기로 했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막걸리도 한잔했다.

천수가 쓰러져 자고 있을 때 여명은 밝아오고 있었다. 군홧발 소리는 그의 코 고는 소리를 잠재웠다. 그는 체포됐고 여수 경찰서로 끌려갔다. 그 제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인상을 받았으나 이 정도는 이해하고도 남았다.

그럴 수 있다.

이 정도 대우는 참을만하다. 그러나 상황은 악화됐다. 처음에는 심문 조서를 작성하는 듯 했던 그들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의자에 묶어 놓고 그를 때렸다.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찼다. 어떤 때는 몽둥이를 찾았다. 화덕에 불을 달군 쇠꼬챙이를 눈앞에 들이댈 때 그들은 웃고 있었다.

불어.

불어, 지질 때 딱 한마디만 했다.

불어, 다 불어.

그러나 천수는 그럴 수 없었다. 이미 다 말했기 때문에 더 불 것이 없었다. 그들 중 하나는 그가 정말로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서청간부였다.

민구야, 천수는 민구를 찾았다.

그러나 그 앞에서 온 민구는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도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불어, 그래야 산다.

천수는 포기했다. 잡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숨마저 그렇게 했다. 그래서 그가 지금 쉬고 있는 것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남의 숨을 대신 쉬고 있었다. 그의 혼은 몸을 빠져 나갔다.

그러면 그들은 찬물을 끼얹었다.

지하의 습한 곳이 더 눅눅해졌고 한기는 살을 파고 들었다. 만주에서도, 간도에서도 이렇게 춥지는 않았다. 입술을 덜덜 떨며 천수는 추워, 춥다고 한 마디 했다.

불어, 다불어 다음에 나오는 대답이었다. 그런 다음에는 죽은 사람처럼 고개를 어깨로 떨궜다. 한 번 떨어진 고개는 다시 서지 않을 것처럼 고꾸라져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원망하지 않았다. 심지어 민구조차도 천수는 이해했다. 내가 죽는다면 그는 살아야 하고 기왕 살 거면 잘 살기를 바랐다.

언뜻 본 그의 아내는 품위 있었다. 술을 내올 때는 조신했으며 입가에 작은 미소도 보였다. 그 모습은 아내와 닮았다. 그는 그녀를 보면서 아내를 떠올렸으나 아내는 이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그녀 모습을 닮은 애들이 커서 돈 많이 벌고 훌륭한 사람이 된 어른의 모습이 어른 거렸다.

애들을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호석이나 연순이 아니었다. 자신의 아들, 딸이 아니라 서청대장의 자식들이 눈 앞에서 거미줄처럼 어른 거렸다.

생전에 그들을 본 적이 없다. 그런 그들이 지금 천수의 눈 앞에서 보름달처럼 떠오르고 있다. 눈 앞에 뚜렷이 떠오른 그것은 아내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오래 보아 온 아이들처럼 방긋 웃는 자태로 여유롭게 서 있었다. 중학교 다니는 딸은 하얀 옷을 입었다.간도에서 보던 바로 그 하얀 옷이었다.

치마는 검정색으로 물들었다. 오른 손에는 가방을 들었다. 허리에 매는 책보아닌 가방은 그가 서청대장의 딸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소녀는 시건방 떠는 대신 얌전했으며 공부에 맛을 들였다.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욕망이 깊었으며 그 욕망이 채워지면 다른 욕망을 찾아 밤새도록 책을 읽었다.

아들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3년 터울의 아들은 축구를 좋아했다. 가죽공은 아니었으나 고무 공을 차는 애는 여수에서 아마도 그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는 고무신 대신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다녔다. 아이들이 꺼먼 때가 낀 뒷굽치를 고무신으로 겨우 가릴 때 그는 끈으로 묶는 운동화를 신었다.

신발은 그가 서청대장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한 발을 앞으로 뻗으면서 나아갈 때 그는 으스댔다. 학교 선생이 살갑게 대해주는 것은 선생들도 신지 못하는 운동화를 신고 녀석이 학교에 오기 때문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아이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애국자의 아들이라고 표창장을 주었다. 상장을 받고 돌아선 아이는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발을 앞으로 쭉 뻗어 아이들이 운동화를 잘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천수는 아이들을 만나면 한눈에도 그들을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번도 본 적 없었지만 이미 여러차례 만났다고 천수는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든 것은 막 찬물 바가지를 받고 몸을 떨면서 나갔던 정신이 잠깐 들어온 틈이었다.

반란군 대장 천수는 재판도 받기 전에 죽을 운명이었다. 그가 알려준 산속의 은신처는 서청단원들이 도착하기 전에 다른 곳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이 다 불지 않은 이유라고 고문관들은 천수를 다그쳤다. 그들은 계급으로 그를 불러주지 않았다. 독립군으로 혹은 반란군 대장으로 그를 취급하지 않았다.

그저 술 먹고 이웃을 팬 불량배 취급을 했다. 한 번도 사상범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그가 헛소리처럼 조국이나 애국이나 이런 말들은 내 뱉으면 그들은 같잖은 것이 주접을 떤다고 발길질을 해댔다. 그렇게 여수 경찰서에서 보름간 천수는 고문을 당했다.

빨갱이 자식, 그들은 그 말 끝에 으레 그를 향해 침을 뱉었다.

고문보다 더한 모욕을 견딘 것은 그가 살고자 하는 의지가 남달랐기때문이 아니라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몽둥이가 머리로 날아와서는 급소인 정수리를 비켜갔고 질러댄 발길질은 갈비뼈를 바람처럼 스쳤다.

인두불은 혈관을 뚫기 직전에 멈췄다. 상부에서 찾는다는 연락에 고문관이 뒤돌아 보면서 손에 힘을 떨어 트렸기 때문이다.

천수는 그 때 똑똑히 보았다. 간도 토벌대장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돼 있었다. 감히 자기를 부르는 자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한 창 일을 치르는데 문을 두드리는 자는 예의가 없는 상관이외에는 달리 있을 수 없었다. 여기서 그 보다 높은 자는 없었다.

서울에서 어떤 전갈이라도 내려 왔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는 두리번 거렸다. 작은 눈이 뱀처럼 한 곳을 응시했다. 토벌대장, 정환, 구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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