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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29 08:19 (금)
다정한 친구는 아니었어도 약간의 우정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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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친구는 아니었어도 약간의 우정은 있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0.09.22 11: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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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걷자 다리가 붕떠 물결 위의 깃털처럼 흔들렸다. 바람 부는 대로 파도 이는 대로 떠다녔다. 자신의 의지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남이 하라는 대로 따라 하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물 위에 떠 있는가, 가만히 누워 휴식이라도 취하는 사람처럼. 호석 아버지는 그것이 궁금하다는 듯이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사실 궁금할 것도 하나 없었다. 의지란 힘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지금은 그것이 없으니 나 말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르면 된다. 협상하기 위해 가는 길도 마찬가지다.

누구와도 상의 없이 다녀오겠다고 마치 고독한 결정인양 했으나 실상은 동지들의 의견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눈으로 몸으로 그렇게 하라고 채근했다.

그것은 항복이지 결코 협상이 아니었다. 목숨만은 살려달라는 자수였다. 비겁했으나 그는 그 길을 따랐다. 외통수에 몰렸을 때는 판을 뒤집기 보다는 졌다고 인정하는 것이 신사다운 태도였다.

나는 죽는다. 그러나 잘하면 동지들은 살 수 있다. 어차피 죽는 목숨이니 나머지를 살린다면 인간의 도리는 하는 것 아닌가. 그때 왜 도리가 생각났는지 모른다.

마땅히 해야 할 바른길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비겁하지 않겠다는 용기라기보다는 자포자기 심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신 하나로 남은 대원의 생을 구하는 것에 무슨 인간적 도리 같은 것이 자리 잡을 수 있나.

끼어들 수 없는 자리는 양보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 시국에 누가 누구에게 양보할 것인가. 그는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앞으로 옮겼다. 잠깐동안 휘청했다. 어르신들이 말하는 빈혈인가. 배 멀미가 나는지 어지러운 의식 사이로 길가에 심은 코스모스가 따라 움직였다.

걷고 있는지 아니면 멈춘 것인지 알지 못할 만큼 허약한 몸이 정신 줄을 놓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 호석 아버지는 서북청년단 소속 간부 하나를 마음속에 지목하면서 그와 협상하기를 바랐다.

그를 생각하자 자수해서 대원들을 살리겠다는 마음은 더욱 굳세게 자리 잡았다. 그라면 대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내 목숨은 내놓겠다.

나까지 살려 달라는 말은 아니다.

그럴수 있나.

이 세마디 문장이 혀 주위에서 계속 맴돌았다. 간혹 순서가 바뀌기는 했어도 비슷한 말들이  떠나지 않고 어슬렁거렸다.

대화 하다 안되면 놈을 죽이고 나도 죽으리라, 그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보다 더 비굴할 수는 없다. 다 내놓았는데도 안된다고 하면 다른 선택지는 없다.

그들은 어디있나.

우선 약속을 해라.

있는 곳을 먼저 말해라.

그럴수는 없다.

이 정도 실갱이라면 상황은 안봐도 안다.

주도권을 쥐었다고 다 내 줄수는 없다. 서청간부가 윽박질러도 할 수 없다. 내 카드는 이것뿐이다. 그는 옆에 붙은 동료에게 이런 말을 주절댔다. 아무말 없이 그가 듣고 있었다.

실패하면 어떻게 할까요.

너는 도망가도 좋다.

나는 그러지 않으마.

그들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부터는 조심해야 한다. 멀리 인가가 보인다. 어디선가 매복조의 조준된 총알이 가슴이 박힐지 모른다.

그들은 논두렁에 바싹 붙어서 주변을 살폈다. 날이 어두워 지고 있었다.  완전히 어두워 지기를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하루 종일 일하고 귀가하는 농부처럼 태연하기 걸어갈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가을 걷이를 끝낸 곳도 있고 아직 시작인 곳도 있고 들판은 농부들이 오고 가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호석 아버지는 껍질 벗긴 낱알 하나를 씹으면서 녀석을 떠올렸다. 흐릿한 영상속에 녀석이 우는지, 웃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한 마을은 아니어도 녀석과 그는 같은 면 출신으로 중학교를 같이 다녔다. 둘이 함께 걸어서 학교에 가기도 했고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다정한 친구는 아니었어도 약간의 우정은 있었다. 견재하는 심리도 있었다. 공부도 그랬고 운동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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