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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0-09-29 19:48 (화)
350. 조찬클럽(1985)- 뛰어 넘을 수 없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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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 조찬클럽(1985)- 뛰어 넘을 수 없는 것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0.09.11 15: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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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휴즈 감독의 ‘조찬클럽’을 보면서 갑자기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리나>의 문장이 생각났다.

행복한 가정은 비슷비슷하고 불행은 가정은 각기 이유가 있다는 내용 말이다. 톨스토이식 표현을 빌려 오고 싶은 충동은 첫 장면부터 시작됐다.

각기 다른 차에서 각기 다른 아이들이 각기 다른 부모와 각기 다른 몇 마디 말을 나누고 학교로 들어선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없다. 쉬는 날, 토요일에 남녀 학생 5명이 모인 것은 벌칙을 수행하기 위해서다.

담임은 서로 다른 이유를 들이대면서 이들의 잘못을 지적한다.

▲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힌 아이들이 마음을 터놓고 갈등을 해소하고 있다. 부모와 10대 청소년 간의 인식 차이는 보는 내내 아슬아슬하다.
▲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힌 아이들이 마음을 터놓고 갈등을 해소하고 있다. 부모와 10대 청소년 간의 인식 차이는 보는 내내 아슬아슬하다.

지루한 일장 연설이 있고 난 후 그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종류의 에세이를 쓴 것을 명령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처럼 어려운 일도 없는데 담임은 우수 학생도 아닌 아이들에게 그 어려운 에세이를 제목으로 내준다.

그것도 한 단어만 되풀이해서 써서는 안되고 1000개 이상의 새로운 단어로 작성해야 한다. 척 봐도 불량끼 있는 학생들의 태도와 언행으로 보아 제대로 숙제가 마쳐질지 의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이 다른 네명과는 다른데 왜 여기 왔는지 도무지 모른다는 태도다. 나머지 네 명과 자신은 다르다면서.

학생들은 과연 미션을 멋지게 완수하고 무사히 귀가 할 수 있을까. 숙제를 내 준 선생이 자기방으로 가자마자 아이들은 서로 다툰다.

제 잘 난 멋에 산다고 하더니 말 그대로다. 동료라는 의식이 전혀 없고 상대의 기분은 아랑곳 없이 나오는데로 말을 뱉는다. 당장 주먹질이 오가도 이상할게 없다.

불량학생이라기보다는 범죄자들의 온상같다. 도저히 말로는 고칠 수 없는 형편없는 학생들이다. 벌칙이 아니라 범죄 형량을 따지는 법정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약간씩 반전이 일어난다.

아이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와 선생의 문제점이 부각된다. 잘못은 학생이 아니라 부모나 기성세대 쪽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사실 여부를 떠나 일말의 공감대를 얻는다.

십대 청소년들의 분노 상실이 점차 우정과 이해로 방향을 틀고 있다.

영화가 해피앤딩 쪽으로 끝나가고 있다고 해서 거기 모인 불량 십대 들이 모범 학생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게 떠들다가 끝난다다.

영화 밖이라면 이들은 벌써 사고를 쳐도 여러번 쳤고 누구도 이들에게 동정심을 보일 이유가 없다. 일탈 앞에서 용서나 이해심 같은 것이 들어서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일방적으로 나쁜 아이들로 몰렸던 그들이 어느 정도 까지는 관객에게 다가왔는 점은 감독이 처음보다는 중간 이후를 잘 끌고 왔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명성이 자자했다.

‘조찬클럽’이라는 제목도 확 눈에 띈다. 무슨 기업의 대표들이 모여 주제를 발표하고 식사를 하면서 친목을 도모하는 그런 형태의 조찬클럽을 연상했다가 토요일 등교라는 허를 찌르는 모양새가 좋았다.

갈등과 화해와 이해심이라는 상승과 평균과 하강이 그럴 듯 했다. 저예산으로, 각본하나로 이만한 성과를 낸 것은 주제를 제대로 파악했고 시기를 제대로 골랐기 때문이다.

다 자식 잘 되기 위한 조치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부모의 틀에 가둬 두려는 안일함에 대한 복수라고나 할까. 어른들의 비겁한 태도는 비난 받아 마땅하다. 그들이 왜 그렇게 되고 싶어 하지 않는 부류로 부모를 선택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자.

국가: 미국

감독: 존 휴즈

출연: 에밀리오 에스테베르, 폴 글리슨

평점:

: 필자가 학창 시절, 부모님은 일제 시대 이야기를 하셨다. 터무니 없지는 않지만 너무 황당했다.

어느 날은 한국전쟁을 꺼내 들었다. 그럴수도 있겠다 싶었으나 한 귀로 흘려 들었다. 도무지 관심을 가질 사항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와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세대차이였다.

시간은 흘러 상황은 역전됐다. 1980년 광주를 아느냐고 어느 새 내 나이가 된 아이들에게 물었다. 혹시나 했으나 도대체 그게 뭐지? 처음 듣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선사 시대 이야기는 전혀 흥미가 없다는 투였다.

젊은 필자는 직접 겪었고 아이들은 30년 정도 전에 있었던 과거의 일이었다. 일제시니, 한국전쟁이니 하는 것과 80년 광주가 동일한 연속선상에 있었다.

아버지 세대와 자식 세대는 이 정도로 멀었다. 넘을 수 없는 전방의 철책선과 다를바 없었다.

그곳의 철책은 워낙 견고해 뉴스에서처럼 철책 너머로 귀순했다는 이야기는 달나라 이야기로 치부하지만 세대간의 차이는 바로 그 철책과 다를 바 없었다.

영화는 딴 전이고 그 생각이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내내 이어졌다. 한 세대 30년은 아무리 잔혹한 사건이라도 잊게 만든다고 한다. 세월의 힘 앞에서는 어느 누구도 막을 장사가 없다.

그것을 확인해 준 것 만도 이 영화는 존재 이유를 증명했다. 아이들의 에세이는 어른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는 노는 물이 다르다는 것을 전해준다.

오랫 만에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를 들으며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니 이런 기분 괜찮다.

이때 문득 <호밀밭의 파수꾼>이 떠올랐다. 16살 학생 홀든 콜필드가 선생과 부모와 학교 앞에서 겪는 무력감이 '조찬클럽'의 학생들과 무척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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