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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3-12-11 17:46 (월)
운명에 관한 것이었으므로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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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에 관한 것이었으므로 하나님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0.09.08 14: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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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식구들이 보고 싶었다. 누나는 잘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당찬 성격과 어머니의 차분함을 갖고 있다.

어디다 내놔도 살아갈 것이다. 좋은 점만 다 닮았다. 그에 비해 호석은 장점은 빼고 단점만 부모에게서 물려받았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아버지의 깊고 우수에 찬 눈빛만 해도 그렇다. 거울을 보면 영락없는 아버지 눈매다. 아버지의 만주 시절을 담은 지갑 속의 작은 사진에서 아버지는 웃고 있었다.

표정 전체가 그랬는데 눈을 가리고 보면 아버지는 화난 얼굴로 보였다. 손을 치워야만 어떤 상태인지를 알 수 있을 만큼 모든 것이 눈에 담겨 있었다.

라라를 찾아가는 <닥터 지바고>의 주인공 오마 샤리프를 닮았다. 이목구비의 조화로 표정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눈 하나로 아버지는 자신을 다 꺼내 보였다.

호석도 마찬가지다. 눈을 가리면 그가 어떤 상태인지 아무도 모른다. 배고 고픈 것인지, 불룩해진 아랫배로 힘겨워 하는 지 알 길이 없었다.

이마가 넓은 것은 어머니의 뻬다 박았다. 좀 과장해서 펼쳐 놓은 공책만한 이마는 웬만한 모자가 맞지 않았다. 교모를 쓸 때 중학생이 고등학생용을 쓰고도 작아서 억지로 꾸겨 넣을 정도였다.

이마가 훤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좋은 말로 이해 했으나 그 때 처음으로 큰 이마와 둥글고 위로 솟은 두상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누나는 아니었다. 큰 키는 아빠를 닮고 호리호리한 것은 엄마쪽이었다.

왼쪽 볼에 난 작은 보조개는 외할머니도 있었다는 어머니 말로 미루어 외가 쪽에서 온 듯 했다. 외가를 생각하면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외할머니는 늘 맛있는 것을 만들어 주셨다.

가족을 생각하자 호석은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겨우 하루 결석한 것이다. 둘러댈 것은 많다. 갑자기 쓰러 졌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끌려가서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며 붕대 감은 팔을 들이밀 수도 있었다. 상처 정도야 가볍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다 부질없었다.

돌아가 본 들 달라질 것은 없었다. 빨갱이 자식이라는 사실이 확인되고 아이들은 소문을 듣고 수군 거릴 것이다. 그게 어디 사람이 사는 것인가.

공부는커녕 놀기도 어렵다. 그런 삶은 호석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불과 3개월 만에 퇴학을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다.

작은 아버지의 정성에 대한 배신을 어떻게 감당할지 두렵기도 했다. 그러나 쫓기듯 떠난 여수였다. 부담스런 시선을 작은 아버지 역시 떨쳐 내고 싶었기에 생각하면 그렇게 고마운 것도 아니었다.

과거를 잊고 새롭게 출발하자. 목사님이 그런 미래를 위해 무언가 해줄 것이다. 호석은 가방에서 작은 성경책을 꺼내 들었다. 짚이는대로 아무대나 펴서 읽었다.

자신을 구원해줄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을 미뤄두지 않고 바로 써먹을 심산이었다. 적선의 지름길로 들어가고 싶었다. 꾸불꾸불한 길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청량리에서 구리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은 무력에 굴복하기보다는 절망을 이겨내려는 심산이었다.

호석은 누군가 자신 근처로 다가왔을 때 모른 척 했다. 읽던 성경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되레 더 깊숙이 파고 들었다. 그는 오래도록 자신에게 다가온 사람의 존재를 느꼈다.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나서 그 제서야 알았다는 듯이 조금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 책을 덮고 옆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나 사람은 벌써 사라지고 주변은 아무도 없었다.

아예 오지 않았는지 아니면 왔는데 사라지는 것도 몰랐는지 앞서와 같이 텅 빈 공간만 남아 있었다. 관객이 없는 곳에서 무언극을 하는 얼빠진 배우모양 호석은 잠시 동안 그렇게 있었다.

그 순간 마치 자신이 전파력이 강한 전염병 환자라도 된 양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상황을 통제할 수 없게 되자 호석은 경계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다시 청량리로 달려 학생주임의 눈을 피해 교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고 쉬웠다.

그는 갈등했으나 마음은 이미 그러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바뀔 일은 없었다. 그러자 과연 이곳 목사가 자신을 받아 줄 수 있을지 의아스러웠다.

빌어먹는 거렁뱅이처럼 여기 저기를 다니고 싶지 않았다. 점찍은 딱 한 곳에서 운명처럼 자신과 이 교회가 마주치기를 기대했다. 다른 곳에라면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바꿀 수 없을 것 같았다.

운명에 관한 것이므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지만 어쩐지 좋은 예감이 들었다. 해는 중천으로 떠올랐고 휴일이 아니어서 들락거리는 신도는 거의 없었다.

늦게 교회 문이 열렸다. 교회는 왜 문을 닫어 거는지 호석은 궁금했다. 절간은 항상 문이 열려 있었는데 교회는 절과는 달랐다. 여수에서 그는 절 구경을 여러차례 다닌 적이 있다.

절을 구경하러 버스까지 탄 기억도 가물거린다. 엄마는 아빠가 사라지고 난 후 학교를 그만 두고 여기 저기 사방을 다녔다. 주로 남도 지방이었지만 어떤 때는 부산으로 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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