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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5 18:17 (목)
단지 말하기 귀찮아서 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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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말하기 귀찮아서 불지 않았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0.08.27 1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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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는 역전됐다. 토벌대는 독립군을 수하에 두고 부렸다. 남로당에서 활동했던 토벌대 장교는 즉시 옷을 갈아입었다.

그 당에서는 도저히 생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살기 위한 행동이었다. 생존 앞에서 양심이나 인간적 고뇌는 후 순위였다.

그는 잡힌 동료들의 이름을 줄줄이 불었다. 묻지 않는 것도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다. 굳이 말하지 않으면 살 수 있는 잔챙이들까지 이름을 댔다. 그는 끝내 실토하지 않았던 형과는 달리 사형을 면했다.

나와라, 석방이다.

이 말 한마디로 그는 죽음의 문턱을 벗어났다.

그를 봐주는 뒷배는 군복을 벗기는 대신 새로운 군복을 입혔다.

새 군복을 입고 거울을 보고 있을 때 그는 형의 사형 집행 소식을 들었다.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한 것은 어리석은 자라고 질책하기 위해서였다.

그뿐이었다. 거울 앞에서 착 소리가 나도록 절도있는 자세로 차렷 자세를 한 그는 역시 각도 있는 동작으로 경례를 올려붙였다.

천황폐하 대신 자신에게 하는 셀프 인사였다. 만족스러운 듯 그는 옅은 미소까지 지으면서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는 300 프로 완성하겠다고 두 주먹을 몸이 부르르 떨 정도로 세게 쥐었다.

그는 바로 일을 시작했다. 그런 것은 지체할 것이 아니었다.

아주 좋은 에이급 전투복과 전투화를 내려다보면서 그는 토벌대 잡듯이 공산당을 잡기 위해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토벌대로 독립군을 토끼몰이하던 그가 이제는 남로당을 나와 자기가 몸담았던 조직의 뿌리를 뽑기 시작했다.

놀라운 변신에 그를 아는 사람들은 혀를 내밀고 끌끌거렸으나 그런 자들은 그에게 보기 좋게 당했다.

빨갱이가 여기있다.

그가 이런 말을 하면 부하들은 붉게 달은 쇠 인두로 지목한 자의 등 짝에 빨갱이라고 세글자를 새겼다. 그날로 빨갱이가 된 자는 즉결 처분되거나 줄줄이 동료를 불거나 선택의 기로에 섰다.

아니라고 나는 그저 밥을 조금 더 달라고 했을 뿐이라고 변명하면 나는 빨갱이다, 라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고문했다. 그는 고문의 달인이었다.

텔레비전에서 고문 기술자를 뽑는다면 면접도 없이 특채로 입사가 확정될 정도로 그 방면의 일인자로 부대 내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일제에서 배운 기술은 그것도 기술이라고 버리지 않고 그대로 써먹었다. 독립군을 고문하던 방식이 이제는 빨갱이 사냥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어제까지 친구로 혹은 동료로 그를 부르던 자들은 이제 감히 누구도 그 앞에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뒷배들은 그런 그를 살려 두기를 잘했다고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고 맞은 것에 만족했다. 뒷배들은 그에게 권총은 물론 기관총까지 선물로 주었다. 더 큰 임무가 그에게 맡겨졌다.

수군대던 자들은 침묵했고 나중에는 동조했으며 급기야 그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하루게 다르게 그는 상승장을 탄 증권시장의 그래프처럼 오른쪽으로 쑥쑥 올라갔다.

그 같은 위치에 오르도록 도와준 뒷배에게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그는 왼손 단지를 잘랐다. 그는 때를 알았다. 지금보다 늦는다면 엎드려 절받기다.

상대방보다 한발 앞서는 것이 그가 취하는 태도였다. 천황폐하를 위해 오른손 단지를 자른 때와 같은 심정으로 그는 잘린 손을 들고 한동안 몸을 떨었다.

아프거나 피 때문에 공포스러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이런 기회를 준 뒷배들의 은혜를 생각하니 갑자기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이런 것이 애국이구나.

그가 천황폐하 만세 다섯 글자를 잘린 손가락에서 나오는 피로 썼다는 말은 여러 차례 언급했다. 그것을 기억하는 독자들은 이번에는 그가 왼손 단지를 오른손으로 집어 들고 무슨 글자를 쓸지 궁금할 것이다.

천황이니 만세니 같은 단어를 떠올렸다면 그의 성격을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유행이 지났다는 것을 눈치 빠른 그는 알아채고 신식냄새가 나는 단어를 신중히 선택했다. 그가 고른 문장은 이것이었다.

나는 공산당이 미워요.

흰 광목천에 글을 쓰고 그것을 액자에 담아 그는 지원하는 뒷배에게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두 손으로 공손히 전달했다. 받은 자는 이자는 써먹을 만하다는 듯이 뒷목을 잡고 일으켜 세우면서 그만하면 됐어, 한마디 했다.

동지들을 밀고해 살아남은 자는 이제 장군의 지위에 올랐다. 높은 곳에 오르자 그는 여수에서 반란의 총구를 들었던 호석 아버지를 언뜻 생각했다.

그러려고 일부러 한 것은 아닌데 어인 일인지 머리에서 한동안 떠나지 않았다. 지리산에서 투항한 호석 아버지는 여수 경찰서에서 고문받을 때 장군이 된 그 자의 이름을 불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출신 성분이 붉은 자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의리 때문이 아니라 그냥 단지 말하기가 귀찮아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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