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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먼동을 따라 남은 자들이 산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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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먼동을 따라 남은 자들이 산을 떠났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0.08.25 12: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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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연병장에 모인 병사들에게 짧게 말했다.

같은 민족을 토벌할 수 없다.

우리는 간도의 토벌대가 아니다.

병사들은 환호했다.

그는 즉시 반란을 일으켰다. 반항하는 자는 무력으로 진압했다. 대비 없던 당국은 혼란에 빠졌다. 즉시 제압하라는 명령은 잘 시행되지 않았다. 반란군은 화순에서 일차 저지를 받았다.

그러나 경찰은 13분이 채 되기도 전에 제압당했다.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그들은 여수는 물론 인근 순천까지 장악했다. 투항하는 자들은 무리로 끌어들였고 대드는 자들에게는 총을 겨눴다.

거침없이 그들은 주변으로 세를 몰았다. 그러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밀어뜨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됐다.

반란군은 거기까지였다. 미리 준비하고 단계별로 상황을 정리하고 장악하는 과정은 느려졌고 지휘부 간 사소한 다툼이 벌어졌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디까지 가느냐였다. 서울까지 가느냐, 아니면 예서 멈추느냐 갈팡질팡했다.

그 사이 전열을 정비한 정부군은 사방에서 그들을 옥죄어 왔다.

불안한 주민들은 밖으로 나가기보다는 안에서 망을 보면서 푸른 옷을 사람들이 반란군인지 정부군인지 확인하기 바빴다.

반란군의 진압은 시간문제였다. 보급로가 차단된 그들은 당장 먹을 것이 없어 민가를 덮치기도 했다. 악질 지주를 타도하자는 무서운 구호도 나왔다. 그들은 해서는 안 되는 실수를 저질렀다.

대개는 그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무고한 사람이 희생됐다. 전쟁통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항변하는 것은 애초 같은 민족을 토벌할 수 없다는 반란의 원칙과도 맞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패망을 자초한 결정적 이유였다. 민간인의 도움을 받기는커녕 자신들의 숨은 위치를 알려주는 밀고자를 양산한 때문이었다. 그들은 차례로 소탕됐다. 목숨을 겨우 부지한 자들은 산으로 숨어들었다.

지리산이 은신처로 적당했다.

산세도 크고 깊어서 계속 걸어 들어가면 쫓아오는 추격대를 피할 시간은 넉넉했다. 호석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함께 하겠다는 13명의 동지를 이끌고 피아골을 지나 능선을 타고 천왕봉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죽음의 그림자도 그들을 따라왔다. 간도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생한 것이 이렇게 끝장을 본다고 생각하니 인생이란 별 거 없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했고 그런 감상을 공책에 끼적였다. 숨 막히는 전투가 끝나고 나서 몇 자 적으면서 궁상을 떨던 남미의 어떤 게릴라 전사도 그러지 않았던가.

둘은 전혀 만날 수 없는 시공간에 있었으나 살아온 삶의 힘든 궤적은 따지자면 비슷한 면도 있었다. 호석 아버지는 순천여고 선생인 아내와 꿀 같이 보낸 지난 몇 달을 회상했다.

즐거웠던 결과로 아내는 임신했고 태몽은 딸을 암시했다. 무언가 물속에서 나왔는데 씩씩하기보다는 얌전했고 나대기보다는 수줍어했다.

잉어였는지 인어였는지 모른다고 아내는 그날 아침상에서 이런 말을 했다. 호석 아버지는 딸이라는 말을 굳이 하지 않고 훌륭한 자식 낳아 잘 키우자고 손가락을 걸기 위해 수저를 들었던 손을 내밀었다.

아내가 우스워하다가 입속의 밥알이 튀어 상에 떨어졌으나 나무라기보다는 둘은 깔깔 웃으면서 잘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잘살아보세 하고 노래 불렀다.

아내는 고왔다. 그는 그런 아내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살아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생각은 여기서 멈추고 떠오르지 않았다. 산에서 살아서 나갈 방도는 없었다. 그렇다고 장렬하게 전투하다 죽을 생각도 없었다. 명분이 사라졌다.

애초 혁명을 바라지는 않았으나 그런 식으로 흘렀는데 지나고 보니 글러 먹었다. 그는 산의 깊은 골짜기를 내려다보면서 상황종료가 임박했음을 실감했다.

모두 내려가라.

그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너희는 죄 없다.

수석 부관인 특임 중사가 자신은 끝까지 사령관님을 따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는 권총을 꺼내 들었다.

당장 내려가라.

살기 어린 얼굴이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것 같았다.

부하들은 다음 날 모두 산을 내려갔다.

그들은 이른 아침 먼동을 따라 그렇게 떠났다.

호석 아버지는 삼 일 후 여수 경찰서를 찾아가 자수했다. 모두 자신 탓이라고 했다. 부하들은 죄가 없으니 설혹 잡았다고 해도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산에는 남은 사람이 없으니 헛고생 말고 모두 철수하라고도 했다.

그는 13일 간 고문을 받았고 만신창이 상태로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법정은 그의 자수를 감형 사유로 들기보다는 잔인한 반란군의 수괴가 나라를 혼란에 빠트렸다고 호령했다.

무서운 눈의 법정이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호석 아버지는 바로 사형을 집행해 달라고 말했다. 간절히 원하는 목소리였다.

그렇게 되면 영광입니다.

그래야 아내가 자유롭게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법정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대와는 달리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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