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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식으로 차린 제단 앞에서 독립군은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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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식으로 차린 제단 앞에서 독립군은 고개를 숙였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0.08.14 09: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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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벌대를 소탕한 독립군은 스스로 총을 버렸다.

적을 죽이고 자신의 생명을 지켰던 것을 남이 볼 새라 몰래 강물에 던지거나 땅속에 묻을 때 대원들은 더는 사람 죽이는 일을 않겠다고 다짐했다.

다짐에 앞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독립군들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해방된 조국에서 싸울 일이 뭐가 있겠느냐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

버리고 남은 총과 화약 등 일부는 토벌대처럼 그것을 원하는 사람을 찾아 팔아 썼다. 여비에 보태기도 하고 오랜 굶주림과 생사의 기로에서 오는 혼란한 영혼을 수습하기 위해 토벌대처럼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들은 이제 총 없는 빈 손이었다.

이로써 임시정부의 명령은 수행됐다. 호석 아버지 일행은 간도를 떠날 때 이름 없이 사라진 독립군을 위한 제를 올렸다. 그러려고 작정한 것은 아니었는데 대원 중 누군가가 형이 죽었다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그렇다면 작별인사나 하고 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동생의 형이 죽은 것을 모르는 대원들은 없었으나 그 말을 하자 처음 듣는 소리나 되는 듯이 갑자기 숙연해 졌다. 늘 죽음을 달고 다녔으나 익숙해졌다고 해서 슬픔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사과와 배 하나 술 한 잔 놓고 하는 약식의 제단 앞에서 대원들은 고개를 숙였다.

형제는 어떻게 먼 이국의 땅에서 자신이 아니어도 누군가는 했을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쳤는지 누구도 묻지 않았다. 동생은 죽은 형의 사진을 꺼내 성냥불로 태웠다. 집으로 가지고 가지 않겠다는 결의였다. 노모에게 혼자서 살아왔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동생이 두 번 절하고 일어났을 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울고 나자 동생은 이런 식으로라도 형과 작별했으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는 듯이 툭툭 모자를 벗고 손에 대고 털었다. 쿨한 마지막 인사였다.

그들은 이후 정리할 것이 있는지 각자 살펴보고는 없다는 것을 알고 한두 명이 혹은 각자 뿔뿔이 두만강을 넘었다.

간도에서 남은 볼 일이 있는 사람은 시간이 좀 더 걸렸으나 강물이 차기 전에 모두 조선 땅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러는데 꼬박 한 달이 걸렸고 그 한 달은 그들이 임시정부 대장에게 한 약속 기일이었다.

독립군이 들어올 때 죽지 않은 토벌대의 일부도 조선 땅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의 조국은 일본이 아닌 조선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그들은 조국 대신 조상의 묘가 있는 곳을 택했다. 조국으로 갈래 조선으로 갈래 누가 묻지도 않았고 강요하는 사람도 없었다. 자발적 선택이었는데 조국행을 택하는 토벌대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걱정이 됐는지 처음에는 자신들의 정체를 숨겼다.

간도나 만주 혹은 상해서 무역을 했다거나 노가다로 겨우 생계를 이어왔다고 누가 물으면 대답했고 그렇지 않으면 입을 닫았다.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사람이 있으면 정면으로 맞서 노려보기보다는 피했다. 그런 것은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토벌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해방 조선에서 의심하는 자들과 대꾸해 봤자 이득이 될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렇게 처신에 능숙했다.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 틈에 자연스럽게 섞은 그들은 손에 쥔 일장기가 아닌 태극기가 어색했으나 두 손을 하늘로 향하면서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했다.

그리고 그들을 애국가가 나오면 같이 합창했으며 일본놈을 욕하고 손가락질하면 자신들도 그렇게 했다. 어제의 그들은 오늘 없었다.

이제 토벌대의 조국은 누가 뭐래도 조선이었다. 어제의 조국 일본은 오늘의 원수가 됐다. 그들은 일본인이 보이면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면서 친일 부역자 색출에 나서기도 했다.

신이 있다면 이런 자들의 변신은 충분히 용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은 없는지 정체가 드러난 토벌대 중 한 명이 한 시 십삼 분 무렵 낫으로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이 우연이었다.

토벌대와 동향인 독립군이 그의 행적을 알아냈다. 그리고 형을 죽인 자가 바로 그 자인 것을 알고 태극기를 들고 만세 부르는 그 자의 등을 낫으로 찍었다.

찍기 전에 그는 토벌대 아새끼 라고 불렀다. 많은 이들 중 뒤돌아 보는 자는 그 자 뿐이었다. 그 자는 이내 앞을 보고 다시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등에 찍힌 낫이 그대로 있어 아픔을 느낀 그는 낫을 빼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몸을 틀었고 그때 낫을 뺀 동생은 그 자의 얼굴에 피묻은 낫을 다시 내리쳤다.

그 자는 손에서 끝내 태극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숨을 그르렁거리며 마지막 호흡을 할 때 그의 입에서는 천황폐하 만세가 터져 나왔다.

토벌대가 독립군의 손에 죽었다는 소문은 장안에 퍼졌고 다시 토벌대는 거리에서 어둠으로 파고들었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거리는 아직 위험했다. 그러나 위험을 벗어나는데 걸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정부 없는 정부를 장악해 가는 우두머리들은 숨은 토벌대를 찾았다.

색출해서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요직에 앉히기 위해서였다. 군인과 경찰과 검사와 판사들이 토벌대 출신이거나 그들을 옹호했던 자들로 채워졌다.

들뜬 가운데서도 민중들은 그것이 나쁜 것임을 알아챘으나 달리 어떤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입바른 어떤 사람이 토벌대가 웬 말이냐 하고 외치다가 광화문 앞에서 대낮에 경찰 총에 맞아 사망했다.

다음날에 또 어떤 사람이 나와 토벌대를 색출하자고 외쳤고 그 즉시 그도 일본 군복을 입은 경찰 총에 맞자 죽었다.

그 이후로 누구도 토벌대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토벌대는 숨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바퀴벌레처럼 어둠을 친구로 삼지 않고 훤한 대낮을 활보하면서 빨갱이를 색출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자는 경찰이 총을 쏘지 않았다.

토벌대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빠른 것은 그들의 몸에 밴 습성이었다.

일본군은 빠르지 않고 느린 자를 때렸다. 원래 빠른 사람은 더 빨라졌고 느렸던 사람들은 빨라졌다. 토벌대들은 그래서 모두 빨랐다.

몸도 빨랐고 마음도 빨라서 빠른 사람은 토벌대였다. 누군가 곡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면 빠른 건 비행기 대신 토벌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경찰이나 군인으로 신분세탁을 마친 눈치 빠른 그들은 만주나 간도에서처럼 다시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그것은 어렵지 않았다. 빨갱이다 한 마디면 모든 것이 끝났다. 빨갱이로 몰려 잡힌 독립군을 토벌대 출신 경찰이 고문했다.

그들은 빠른 자들이었기 때문에 어떤 일이건 생기면 빠르게 대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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