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석이 전학을 갔다. 그러나 다음날 전학이 아닌 학교를 그만두는 자퇴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또래 애들이 그렇듯이 그런가 보다 하고 민구는 생각했다.
그와 싸웠다고 해서 특별한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다. 학교폭력의 가해자가 책임을 지고 떠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다른 이유가 있을 뿐이었고 그런 이유까지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사정이 어떻든 이제 나와는 별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의자를 빼는 행동이 중지됐고 그로 인해 더는 피해를 보지 않는데 그가 있던, 없던 별 차이가 없었다. 속 시원하다거나 아쉬울 것이 없는 본전치기 같은 것이었다.
새로운 것이 늘 넘쳐나는 교실에서 호석은 그렇게 민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어느 날 주유소 앞에 서 있는 그를 발견했을 때는 상황이 달라졌다. 안 보이던 것이 보이면 마음도 그에 따라 움직이기 마련이다. 사라졌던 그가 주유소에 있었다.
교복 대신 작업복을 입은 호석은 어쩌다 옷을 잘못 입은 것이 아니라 원래 입으려던 옷인 것처럼 어울렸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예전의 그것이 아니었다. 무언가에 의해 자신의 의지가 꺾였을 나타나는 흐릿한 기운이 눈은 물론 얼굴 전체에 번져 있었다.
의자를 빼던 호석의 호기는 어디 가고 꾸중을 듣는 아이처럼 잔뜩 주눅이 들어있었다. 고아도 아니면서 그 나이에 일하고 있는 그가 고소하기보다는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고아라는 하나의 생각에 집중하자 그에게 부모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야릇한 생각이 들었다. 옆방 누나도 그렇지 않은가. 학교 대신 일터에서 일할 때는 일단 그런 의심을 해봐야 한다. 그래야 나와 같은 처지에 있을 거라는 선입관을 이겨낼 수 있다.
늘 같은 길을 갔는데 어제는 보지 못했던 호석이 오늘은 그 앞에 나타나자 당황스러웠다. 호랑이처럼 갑자기 나타났다기보다는 구석진 곳에서 웅크리고 앉아 담배를 피고 있었다.
스쳐 지나갈수도 있었지만 아는 사람인 것 같은 호기심 때문에 자세히 보니 과연 호석이었다. 그새 머리가 길었지만 꾸부정한 표정은 다른데가 있지 않고 몸에 그대로 붙어 있었다.
숨은 고양이가 발자국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주위를 경계하는 것처럼 호석이 고개를 돌렸을 때 민구와 짧은 순간 눈이 마주쳤다. 호석은 본능적으로 손을 있던 담배를 땅에 비벼 껐다.
끌 때가 된 것이 아니라 잘못을 들킨 아이같이 얼떨결에 그렇게 한 듯 했다. 그러나 상황이 파악됐는지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야, 이 촌놈아, 하는 호석의 표정이 짧은 연기 사이로 비어 나왔다. 꺼져버려, 촌놈 자식아. 귀에 이런 소리가 들려 오는 듯했다.
민구가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뒷걸음치듯이 멈춰 섰다.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하기 위한 것처럼 호석이 장갑을 끼면서 민구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이 입술을 앞으로 내밀었으나 말은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민구는 얼결에 너 여기 있다는 말 다른 애들에게 안 할게, 약속해, 하고 진짜 약속을 지키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내민 손을 잡기보다는 기름 묻은 장갑을 손에 끼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가 장갑 속으로 손을 들이밀 때 기름진 소매가 오후의 햇살에 번들거렸다.
양쪽 손에 장갑을 다 끼고도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무시하는 듯한 얼굴에서 아무렴 어때, 그러든지 말든지 하는 묘한 응수의 표정이 두 눈에 어렸다. 그리고는 막 들어오는 차를 향해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주유를 끝내고 이쪽으로 와서 더 이야기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민구는 기다렸으나 그는 민구 쪽으로 올 생각이 없는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도로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민구는 시조사 앞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 청량이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나에 관심없는 호석 앞에서 알짱거리고 싶지 않았다.
청량이 로타리에 도착했을 때 민구는 그제야 뒷목이 뻐근한 것을 느꼈다. 뒤따라 온 호석이 목덜미를 확 낚아채는 것 같아 흠칫 놀라며 뒤돌아보기도 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곧장 집으로 갈까 하다가 민구는 신호등을 건너 빙 돌아서 가기로 했다.
그 길로 가면 볼거리가 많았다.
가판대 말고도 늘 북적이는 뱀 가게 앞에 빙 둘러선 사람들은 약장수의 일거수일투족에 시선을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약장수은 지금 당장이라도 커다란 자루에 있는 구렁이를 꺼낼 듯이 눈길을 그쪽으로 두면서 저놈이 꿈틀거린다고 말했다.
마이크로 떠드는 소리에 그냥 가려던 사람들도 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머리를 기웃거렸다. 그러나 구렁이를 꺼내는 순간 약 파는 작업은 끝나기 때문에 약장수는 그 시간을 최대한 늦췄다.
말 기술이라는 것은 이런 때 필요했고 약장수는 그것을 끌어 올릴 수 있는 데까지 끌어올렸다. 민구는 한쪽 어깨를 들이밀고 약파는 소리를 귓전으로 흘리면서 자루 속에 있는 구렁이에만 초점을 맞췄다.
그것이 세상 밖으로 나와 고개를 들고 쳐다볼 때 사람들이 지르는 환호성에 동참하고 싶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두 번째라고 해서 무뎌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마치 처음인 것처럼 설레는 것은 그런 마음을 감춰야 처음과 같은 것이 밀려들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애들은 가라, 이 짧은 한마디에 민구는 들이밀었던 어깨를 안으로 접었다.
순간적으로 몸이 쪼그라들었다. 애들은, 가라. 약장수는 한 번 더 소리를 질렀다. 애들이 없는 사이에 뱀을 꺼낼 거라는 기대감은 한층 꺼졌다. 둘러선 무리들은 자신들이 애들이 아니고 어른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민구 역시 거기에 속하는지 아닌지, 가름하기 위해 주변을 한 번 둘러 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금세 잊고 다시 약장수의 입과 손에만 집중했다. 기어이 자루 속에 있는 것을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였다. 그러나 그 의지는 종종 꺾이는 경우가 많았다.
한 시간을 기다려도 곧 꺼내겠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정작 자루는 열리지 않았다.
기다리던 사람이 한두 명 사라지면 조급한 약장수는 자루를 들어 올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 다른 곳으로 가려던 의지는 주저앉고 그때를 노려 하던 약 팔기는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내일부터는 도로 반대쪽으로 걸어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