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학교는 예전의 분위기를 되찾았다. 불과 하루 만의 일이다. 세상은 그런 것이다. 그게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도 몇 시간만 지나면 없던 일이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새로운 기운이 어디선가 솟아나기 마련이다.
변화는 선생이 아니라 아이들 때문에 일어났다. 그들은 전처럼 떠들고 웃고 시끄럽게 돌아다녔다. 쉬는 시간이면 뒤에 가서 무얼 먹기도 하고 약한 녀석의 의자를 몰래 잡아 빼기도 했다.
절대로 죽을 것 같지 않았던 절대자가 죽었는데도 그랬다. 침묵과 애도 대신 웃고 떠들었다. 신의 벌이 내려져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학교는 조용했고 세상은 돌아갔다.
이런 생각을 할 때 민구는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넘어질 때보다 더 빨리 일어났으나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피할 수 없었다. 웃음거리가 된 민구는 자신이 한심한 상태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불만이 비참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이것은 절대자의 죽음에 비견될 수는 없으나 심하게 괴로운 것이었다.
뒤돌아보니 가해자는 팔짱을 끼고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덤비려면 덤벼봐, 이 촌놈아. 이것 가지고는 성이 안 차는 듯 했다. 더 해야 할 것이 있다는 듯이 호석이가 되레 큰소리치면서 노려봤다. 그러는 눈빛은 강했으나 꺾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여기서 끝장내지 못하면 이 수모를 계속 당해야 한다는 것을 민구는 슬쩍 보았던 호석의 불안한 눈빛에서 알았다. 한 번은 거쳐가야 할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가해자가 잘못을 말하기보다는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위해 이 촌놈의 자식하면서 손가락질을 했다.
할 수 있는 말이 고작 촌놈의 자식뿐인가. 저도 촌놈이면서 호석은 촌놈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도 민구처럼 전학 온 애였다. 부산의 어느 면에 딸린 작은 리 출신이라고 했다. 민구는 촌놈끼리 위로해주기는커녕 만만하게 보면서 약자를 괴롭히는 못난 놈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센 놈한테 대들지 못하고 약자를 괴롭히는 덜떨어진 인간이 호석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호석이는 의기양양했고 그런 민구의 마음을 알려고 하지 않았고 뭐가 문제인지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되레 화난 것은 자신이고 그 화의 원인이 민구에게 있다는 듯이 연신 손가락질을 해대고 있었다.
어디 조용한 곳에 데리고 가서 말할 수 있다면 약자를 괴롭히는 것은 나쁜 짓이라고 어른처럼 타이르고 싶었다. 자기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서울 애들 앞에서는 주눅든 표정을 짓다가도 민구만 오면 아연 화색이 돌고 거기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비겁한 놈은 되지 말라고 충고해주고 싶었다.
더구나 아무런 사전 신호도 없이 무방비 상태로 있는 상대를 한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 계속하고 앞으로도 그럴 계획을 갖고 있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신상에 좋다고 경고하고 싶었다.
무언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싶은 것의 반복이 있어야 가능했다. 그래야 결심이라는 것도 생기고 그 결심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것이다. 맞짱 뜨기 전에는 원래 그런 과정을 누구나 거친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하고 싶은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아이들의 웃음은 넘어져서 아픈 것보다 창피한 것으로 민구의 가슴을 사정없이 찔렀다.
이럴 때는 호석의 행위보다 그런 식으로 당하고도 가만히 있는 네가 바보 아니냐고 생각할 다른 아이들 때문에 더 힘들었다. 잘나지는 못해도 바보가 되고 싶은 생각은 아예 없었기 때문에 민구는 괴로웠다.
그만하라고 경고는 했었다. 재빨리 일어나서는 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 다른 애들은 표적을 다른 애들로 간혹 돌리거나 돌리려는 시늉이라도 하는데 호석만큼은 아니었다.
집요하게 민구에게만 달려들었다. 한 놈만 팰 이유가 없었고 설사 그렇다 해도 그 대상이 민구여서는 안됐다. 그러나 그건 니 생각일 뿐이고 호석은 자기가 정한 기준을 바꾸지 않았다. 말로 해서는 안 되는 것, 통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정답을 향해 민구는 돌진하기로 결심했다.
좋은 말은 때로는 보약처럼 다가오기도 하지만 간혹 쓸모없고 되레 부작용만 있는 쓰디 쓴 가짜 약이라는 것을 민구가 확인한 순간이기도 했다. 그런 것은 더 늦기 전에 배고픈 개나 먹으라고 던져 줘야 했다.
보복은 필연적이었고 반드시 거쳐서 넘어야 할 다리였다. 신이 있다면 아마도 같은 뜻이었고 그래서 그러라고 묵인했을 것이다. 돈으로 사지 않고 양심에도 걸리지 않는 면죄부를 손에 넣은 민구는 결심은 늦추지 않고 바로 시작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고 온 것을 미루지 말고 당장 실행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화장실에서 결의를 확인한 민구는 앉아 있는 호석의 뒤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것은 어찌나 조용하고 날렵한 행동이었는지 호석은 물론 주변의 다른 애들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나타나는 울렁거림 같은 것도 없었다. 우우, 당 탕하는 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호석은 민구가 그랬던 것처럼 뒤로 벌러덩 나동그라졌다.
뒤를 돌아보면서 웃을 준비를 했던 애들은 자빠진 대상이 민구가 아니라 호석이라는 사실에 놀라서 잠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금 뒤에는 아침부터 굉장한 볼거리라도 된 듯이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면 대개 그렇듯이 상황 파악이 끝나자 다시 조용해졌다.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해 있는 동안 이번에는 민구의 주먹이 호석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넘어진 대상이 민구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을 미쳐 확인하기도 전에 호석이 뒤로 다시 나자빠졌다. 다 일어서기도 전 이었다. 화내기도 전이었다. 두 번이나 넘어진 사실을 호석은 아직 깨닫지 못했다.
내친김에 민구는 달려들어 발로 얼굴을 세게 밟았고 무언가 부서진다는 느낌을 발아래서 민구는 받았다. 마치 나무 사과 상자를 아궁이에 넣기 위해 뽀 갤 때 나는 우지끈한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무시하고 한 번 더 그렇게 했다. 뱀처럼 기어오른다면 짓이겨 주리라, 민구는 발을 들고 막 고개를 드는 얼굴을 걷어찼다. '선빵'의 좋은 점은 이런 것이다. 미쳐 상대가 준비하기도 전에 먼저 날리는 것이다.
그때 문을 여는 드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교련 선생 도끼였다. 그러나 그는 다른 무엇 때문에 정신이 팔려있었는지 조금 전까지 난장판이 됐던 교실의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선생은 운동장에서 하는 제식 훈련을 생략하고 정신무장 교육을 하기 시작했다. 북쪽에 있는 악랄한 대상에 대해, 그 악랄함을 제압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떠들어 댔다.
막 신이 내린 무당처럼 손에 쥐고 있던 지휘봉을 두서없이 흔들어 댔다. 그러다가 자기 말에 흥분했는지 지휘봉의 끝을 아이들을 향한 채 사격 자세를 취하기도 했는데 어색한 것은 감출 수 없었다.
오른손 검지와 중지가 없는 그는 그런 경솔한 자기 모습에 화가 났는지 갑자기 아이들을 쏘아보면서 절대자가 죽은 것이 다 너희들 때문이라는 듯이 뒤늦게 탕, 탕, 탕 소리를 질렀다.
민구는 호석을 슬쩍 훔쳐보았다. 그럴 때 민구는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호석의 분노에 주눅이 든 것이 아니라 혹시나 눈 돌아갔다고 잡혀서 터질 것에 대비한 행동이었다. 핑곗거리를 찾는 도끼에게 걸려들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낸 꾀였다. 두려운 표정은 그가 바라는 바였다.
코에서 피가 나오는지 휴지 같은걸로 콧구멍을 싸맨 호석이 고개를 숙이고 책을 읽는 시늉을 했다. 그는 당연히 떨고 있었다. 걱정 때문이 아니라 분함 때문이었다. 굳이 그런 감정을 감추지 않았고 총 맞은 멧돼지처럼 씩씩거렸다.
교련 선생이 민구가 아닌 호석을 보았다면 당장 끌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악랄한 자들을 재차 언급하면서 시선을 학생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겼다.
다행이었다. 숙인 고개를 들지 않고 있던 호석은 떨던 치를 계속 떨었고 악랄함을 때려잡듯이 나를 그렇게 하려고 어서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종이 치고 함부로 떠들지 말라는 경고의 마지막 말을 하고 교련 선생이 교실 문을 열고 교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호석이 달려들었다. 예상했던 것이었으나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는 듯이 민구가 비틀거리면 쓰러졌다. 그런 것에 대비했어도 호석의 움직임은 날랬고 거침이 없었다.
싸움이라고는 하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민구가 일방적으로 당했다. 그러나 이것은 법률용어로 쌍방 폭행이었다. 민구도 한 두 번 그의 얼굴에 주먹을 명중시켰다.
개새끼 죽여 버린다, 호석이 의자를 들고 촌놈 대신 개새끼를 들먹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들었던 의자는 민구쪽으로 날아왔으나 미리 그걸 준비했던 민구 대신 다른 애가 떨어진 의자에 발을 다쳤다. 교문 앞에서 선도대 역할을 하는 반장이 그애를 양호실로 데려가면서 상황은 어영부영 종료됐다.
그날 그 이후로도 호석은 늘 찝쩍댔다.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는 알코올 중독자처럼 끈질기게 민구를 괴롭혔고 민구는 어느 날 그에게서 완전히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주먹이 아니라 공갈 협박이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대령이다. 너, 그거 알아. 조만간 별을 달 거야. 민구가 주인 할아버지를 들먹인 이유는 분명치 않다. 효과를 미리 알았기 때문에 내뱉은 것인지 아무 생각 없이 나왔는지 그냥 해본 말인지, 어쨌든 또 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앉지 않고 서 있을 때 민구는 호석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군인이라는 말에 호석이 움찔했다. 얼굴이 순식간에 파래졌다. 저놈이 왜 저러지 싶을 정도로 한순간 그는 다른 사람이 됐다. 군인이라고 이 병신 새끼야, 그것도 대령이야. 민구는 중령을 대령으로 한 단계 높여서 소리 질렀다.
개자식아, 대령이라고 대령. 이 말은 악마의 총알이 되어 호석의 심장에 깊숙이 박혔다. 개자식이라는 말을 되돌려 줄 때 민구는 환호보다는 아련한 어떤 돌이킬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의자를 빼는 것은 물론 같잖은 심부름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도 호석은 민구를 괴롭히지 않았다. 아예 눈 밖으로 나가 있었다. 주먹이나 힘으로는 안 되니 칼이나 깨진 유리병을 쓰려는 유혹에서 벗어난 것에 민구는 안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