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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무진기행>(1964)-사랑은 애초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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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무진기행>(1964)-사랑은 애초에 없었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0.06.15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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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의 <무진기행>은 서울에서 무진으로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영화로 치면 로드 무비 형식을 취하고 있다. 소설 첫머리는 무진으로 가는 버스 안이며 마지막 부분은 무진을 떠나는 장면이다. 그러니 귀향과 탈향을 다룬 ‘기행’이 맞다.

큰 줄거리는 주인공 윤이 무진에서 머무르는 일주일간 벌어지는 일이다. 회상 형식을 빌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시공을 넘나들며 서로 뒤섞여 있다.

일단 무진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지역은 아니다. 작가의 고향인 전남 순천을 배경으로 했다고 한다. 순천은 오래전에 한 번 가본 적이 있다. 넓은 바닷가와 갯벌 사이로 해안이 아스라이 펼쳐진 풍경이 읽을 때마다 그곳의 어디쯤인지 상상할 수 있어 좋았다.

윤희중과 하인숙이 욕정을 불살랐던 어느 집 근처가 떠오르기도 하고 후배 박과 세무서장 친구인 조와 술판을 벌이는 장소는 추녀 끝이 날렵한 기와집이 겹쳐졌다.

이미 가본 특정한 장소와 연관 지어서 작품을 읽으면 이런 색다른 맛이 난다. 물론 순천을 떠나 내 고향 보령 바닷가의 외진 어떤 곳에서는 하인숙이 윤을 위해 나비 부인 중에서 어떤 개인날을 부르는 장면이 스며들었다.

연상되는 장소는 이쯤에서 접어 두고 윤이 고향 무진을 찾아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살펴보자. 윤은 장인과 부인의 권유로 잠깐 쉴 겸 해서 이곳으로 내려왔다.

장인은 서울에서 큰 제약사 사장인데 사위인 윤을 전무로 승진시키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골치 아픈 일을 하는 동안 머리를 식힐 겸 무진에나 다녀오라는 말을 따른 것이다.

무진을 잠깐 살펴보면 특산물은 없다. 어느 고장에나 있는 특산물이 없는 것은 큰 평야가 있는 농촌도 아니고 무엇을 잡기 위해서는 먼 바닷가에나 가야 하는 어설픈 지형 때문이다. 그러나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안개라고나 할까. 시도 때도 없이 간밤에 진주해온 적군처럼 무진은 늘 안개에 싸여 있다.

안개에 쌓인 무진은 숨기에 좋고 자신의 마음을 속 시원히 드러내지 않아도 들킬 염려가 없다. 그러니 하고 싶은 것은 있으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윤의 우유부단한 성격과도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윤이 짐을 풀자 앞서 언급한 후배 박이 인사차 들렀다. 박은 국어 선생이다. 29살로 34살의 윤의 중학교 후배다. 그가 역시 앞서 언급한 조가 세무서장으로 출세한 사실을 알려 주면서 둘은 저녁에 조의 집에서 술 한잔할 것을 약속한다.

조의 집에는 세무서 직원과 여자 한 명이 있었는데 짐작하겠지만 하인숙이다. 하는 박이 다니는 학교의 음악선생이다. 성악을 전공하고 졸업작품으로 푸치니의 나비부인을 불렀는데 술자리 노래는 성악이 아닌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다.

세무서장과 직원들은 젓가락 장단에 맞춰 흥이 났는데 박이 심기가 불편해서 먼저 자리를 뜬다. 눈치 하나 빠른 윤은 박이 하를 좋아한다고 느끼는데 조 역시 하를 신붓감의 하나로 점찍고 있음을 안다.

이럭저럭 술자리가 파하고 윤과 하는 나란히 밤길을 걷고 있다. 그 밤길에는 무진의 특산물인 안개가 끼어 있을 것이고 안개는 데이트하는 두 남녀의 무드를 올리는데 괜찮은 장치다.

나머지 일행은 은근슬쩍 작품 밖으로 빠지는데 이는 두 사람이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힘을 합쳐 앞으로 어떤 일을 벌일 거라는 암시를 준다.

이 암시는 읽다 보면 후퇴하기보다는 앞으로 자꾸 전진하는데 하는 처음 보는 윤의 팔짱을 비록 짧은 순간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먼저 끼는가 하면 다음 날 만나자는 약속도 한다.

서울로 데려가 달라는 말은 어지간히 친근한 사이가 아니면 하기 어려운데 하는 무엇에 끌렸는지 윤에게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한다. 하도 윤이 서울에서 조 만큼 출세한 제약사 사장의 사위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터이니 이런 부탁은 윤의 지위를 믿고 나온 것 일게다.

다음 날 두 사람은 어느 한쪽이 바람맞히지 않았으므로 자연스럽게 만난다. 그리고 이모 집을 떠나 잠시 기거했던 해안가의 어느 외딴집으로 숨어드는데 무슨 조바심이 났는지 탐색의 시간도 없이 둘은 허겁지겁 몸을 섞고 만다.

하는 윤의 아내라도 되는 듯이 노래를 불러 주고 서울 가는 이야기를 하고 서울에 가고 싶지 않다는 정반대의 말을 지껄이기도 한다.

윤은 하와 며칠을 더 즐겁게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며칠은 윤에게 어떤 결정적인 결심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서울에서 영의 전보가 온다. 영은 윤의 부인으로 앞을 건너뛴 독자를 위해 한 번 더 언급하면 제약사 사장의 딸이다.

윤이 동거하던 여자에게 채였을 때 마침 영도 상처를 했다. 둘은 결혼했다. 영은 재혼이며 윤은 초혼인데 그렇다고 윤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 말로하면 엉뚱한 곳으로 이야기가 흘러갈 수 있다. 생각하며 쓰는 편지는 그래서 중요하다. 윤은 편지를 썼다 찢는다. 그 마음은 현실과 이상과의 괴리 때문일 것이다. 맺어지지 못하고 찢어지는 사랑은 시공을 초월해 언제나 슬프다. 이것은 아무리 안개가 짙게 끼어도 감출수 없다.
▲ 말로하면 엉뚱한 곳으로 이야기가 흘러갈 수 있다. 생각하며 쓰는 편지는 그래서 중요하다. 윤은 편지를 썼다 찢는다. 그 마음은 현실과 이상과의 괴리 때문일 것이다. 맺어지지 못하고 찢어지는 사랑은 시공을 초월해 언제나 슬프다. 이것은 아무리 안개가 짙게 끼어도 감출수 없다.

윤 역시 기간은 나와 있지 않지만 동거 경험이 있고 재력이나 앞으로 얻어질 지위로 보면 되레 이득이 되는 결혼을 했다. 사랑해서 결혼했는지 결혼 후의 생활은 어떤지는 깔끔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윤이 영을 그렇게 사랑하는 존재로 여기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영의 윤을 향한 마음은 어떤 추측도 할 수 있는 근거가 약한데 윤보다는 더 사랑의 마음이 있는듯싶다. 그렇지 않다면 아빠 회사의 전무로 앉히는 작업을 솔선수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영의 전보는 서울로 빨리 오라는 것이다. 급한 일 때문이라고 하니 아니 가볼 수 없다. 생계의 문제이며 자신의 현재와 미래가 걸려 있다. 하와의 관계는 나중에 도모해 볼 수 있고 그럭저럭 정리할 수도 있다.

한 번 만나 만리장성을 세웠다고 해서 하를 책임져야 할 이유가 윤에게는 없고 하 역시 그것 때문에 안달복달하면서 매달리는 여자도 아니다.

되레 하가 쿨해 윤이 들러붙어도 모른 척할지 모른다. 윤은 편지를 쓴다. 손을 잡고 몸을 함께 나눴으니 떠날 때 간단한 편지 한 장 정도는 남겨야 도리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편지 내용은 책에 다 나와 있지만 친절한 독후감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어 몇 자 적어 보자면 너를 사랑하니 서울로 부르면 득달같이 달려와서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다.

부인은 어쩌고 제약사 전무는 또 어쩔 것인가. 그는 편지를 읽어보다 붙이지 않고 찢어 버린다. 그럴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은 있어도 하지 못하는 안개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다.

그에게 무얼 더 기대할 수 있을까. 이런 행동을 윤은 부끄럽다고 표현했지만 실제로 부끄러워했는지는 알 수 없다. 여기서 현대인의 비극이나 허무니 혹은 혼돈 속에서 자아 찾기 등을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대단하다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하를 피해자라고 규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는 주연 배우였고 연출이며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 이 작품은 워낙 유명해 언급하는 것이 진부하고 부적절할 수 있다. 너무 많은 사람이 한마디씩 해서 무슨 말을 해도 남이 한 말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 엉뚱한 이야기가 들어갈까 봐서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두고 감수성의 혁명이니 단편소설의 모범이니 전후 한국 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니 60년대 대표 소설이니 하는 평가는 굳이 두 번 더 언급하지 않겠다.

영화나 텔레비전에도 나왔다. ( 이 가운데 1967년 김수용 감독이 만들고 신성일, 윤정희가 출연한 <안개> 가 제일 좋다. 시간 내서 한 번 볼 것을 권한다. 책과 영화를 비교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작품을 다 읽지 않은 많은 사람이 제목 정도는 기억하는 이유다. 한편 여기에는 여성을 비하한다고 해도 무리가 아닌 표현이 나온다.

작품이 발표된 당시에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오늘날에는 굳이 끄집어서 문제 삼으려면 삼을 만한 대목이 있다. 세무서장 조가 하를 두고 성기 하나 밑천으로 시집 가보겠다는 베짱이라는 표현이 그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와 잠자리를 하고 난 후 윤이 그녀는 처녀가 아니었다는 표현이 다른 하나다.

김승옥은 영화에도 관심이 많아 감독을 하기도 했으며 1968년 이성구 감독이 만들고 윤정희, 신성일 주연의 <장군의 수염>과 1975년 김선호 감독이 만들고 신성일, 윤정희 주연의 <영자의 전성시대> 등의 각본을 썼다. (의약뉴스에 연재 중인 내 생애 최고의 영화에 <안개>와 함께 두 영화 모두 소개됐다. <장군의 수염>을 평하면서 필자는 시나리오가 기가 막히다, 고 썼다)

순천에 한 번 더 갈 기회가 있을 것이고 그러면 윤과 하가 같이 걸었던 그 길이 어디쯤이었는지 상상해 보면서 두 사람이 맺어지지 못하고 찢어진 슬픈 사연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방금 읽기를 끝낸 사람과 함께라면 좋을 것이다. 기억이 가물대서 무엇을 물어보면 바로 대답해 주고 윤과 하의 태도가 서로에게 바람직한지 아닌지 박은 하를 끝까지 따라다녀 연적 조를 물리치고 결혼에 골인했을지, 안 했을지 서로 논쟁 비슷한 것을 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늘을 보았을 때 마침 그 순간 뭉게구름이 안개처럼 지나간다면 대학생 윤은 어느 쪽으로도 참전하지 않고 전쟁을 피한 책임을 어머니에게 돌린 것에 대해 왜 그랬는지 물어보는 시간도 가져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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