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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 파계(1974)- 인간 그리고 올깎이와 늦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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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 파계(1974)- 인간 그리고 올깎이와 늦깎이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0.05.22 15: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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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김제의 금산사는 멋진 절이다. 마이산의 돌탑도 둘러본 적이 있다. 이곳에서 김기영 감독이 <파계>를 찍었다. 몇 해 전 어느 더운 여름날, 두 곳을 가봤다.

그때는 영화의 존재를 몰랐었다. 보고 나서 봤더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든 것은 산기슭과 탑 사이에서 침애 스님과 묘혼 스님의 사랑과 번뇌가 어렸기 때문이다.

두 스님은 육체가 젊은지라 남녀의 감정이 아니 있을 수 없었고 스님인지라 그것 때문에 고통에 휩싸였다. 범인은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수행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 같은 인간의 다중성에 대한 느낌은 이해한다기보다는 보기에 딱하다는 것이다.

그까짓 것 승복을 벗어버리고 머리도 4년 정도 길러서 길게 땋고 다녔으면 하고 바란 것은 겨울이 춥고 배는 고프고 수행의 과정은 어려워 젊음이 그것을 감당하는 것이 버거웠기 때문이다.

쉬운 길을 놔두고 왜 그 어렵고 험한 길을 가느냐고 따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으나 두 스님이 다른 세상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죄를 느끼지 않고 마음껏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섰다.

그만큼 영화 속 주인공은 괴롭고 고통스럽다. 한국전쟁이 시기였으니 더 그랬다.

침해 스님의 도반인 도심 스님은 쌀가마를 도둑질하다 들킨다. 흠씬 얻어터지고도 먹는 것에는 좀처럼 양보가 없다. ( 그러나 알고 보면 이 스님은 이미 도를 터득했다. 훔친 것은 다른 스님의 치료비를 대주기 위해서였다.)

▲ 속세를 등지고 깊은 산속에서 도를 닦는다고 해서 젊은 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되레 더 크게 솟구칠 때도 있는데 굳이 험난 길을 자처해서 가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 상태인가. 사람으로 태어난 원죄를 값기 위한 도의 행렬은 오늘도 계속되는데...
▲ 속세를 등지고 깊은 산속에서 도를 닦는다고 해서 젊은 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되레 더 크게 솟구칠 때도 있는데 굳이 험난 길을 자처해서 가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 상태인가. 사람으로 태어난 원죄를 값기 위한 도의 행렬은 오늘도 계속되는데...

남녀의 사랑과 우정이 영화의 한 축이라면 다른 한 축은 죽음을 앞둔 고승의 법통을 누가 잇느냐에 대한 다툼이다.

무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하고 죽는 스님은 법통을 잇는게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도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하기에 후계자를 정해야 한다. 언뜻 보기에 세속의 일 같은 이런 일들은 절간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니 위아래가 있고 질서가 있으며 후계자 작업이 필요하다.

서로 주인공이 되기 위한 암투가 치열하다. 굶기도 하고 화두를 내고 풀어내는 시합을 벌이기도 한다.

올깎이와 늦깎이들이 세를 규합한다. (여기서 올깎이는 어린 나이에, 늦깎이는 나이가 들어서 절밥을 먹은 경우다.) 말하자면 신구의 대결이라고나 할까.

여승의 등장은 긴장을 고조시킨다. 유혹에 넘어가느냐 아니냐의 여부가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 ( 그전에 한 여승은 법도 높은 스님에게 접근해 여체가 닿았다고 짐승처럼 몸에 열이 오르니 주지에서 물러나라고 호통을 친다. 아니면 목숨을 끊으라고 윽박 지른다. 하지만 고승은 여자를 밀어내는 남자가 인격자냐며 되레 여승에게 죽비를 내리는데 그 서슬은 앞선 서슬을 능가한다. 여승은 무릎을 꿇고 좁은 소견으로 벌인 잘못을 빈다)

가혹한 시험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의 어떤 시험보다도 난이도가 높다고 하겠다. <파계>는 절도 인간이 사는 세상이고 스님도 사람이라는 것을 한 번 더 깨우쳐 준다.

속세의 잇속에서 벗어나려는 구도자의 길과 그 길을 가는 과정의 험난함은 인간은 왜, 도를 닦으려 하는지? 원초적인 질문을 영화를 보는 내내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국가: 한국

감독: 김기영

출연: 정한헌, 임예진, 최불암

평점:

: 죽비 내리는 불교 영화는 흔하다. 그런데 이 영화는 유독 더하다. 자주 때리기도 하지만 때리는 강도도 매우 세다. 아픈 정도를 넘어서 맞으면 골로 갈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니 그 소리 또한 매우 크다. 스님의 은은한 독경 소리나 잠 속으로 빠져드는 목탁 소리는 대신 잘 들리지 않는다. 그만큼 인간 내부보다는 외부로 향한 경계의 목소리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외부 역시 내부의 힘에 좌우되는 것을 보면 인간은 외면보다는 내면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화두에 대해 말했다. 스님은 밤하늘의 별이 몇 개인지 그 무게는 통틀어 얼마인지 알아 냈을까.

세보거나 무게를 재보고 알아 냈을까. 아니면 너무 한다거나 무한대라 거나 아무 말이나 대답해서 고승의 죽비 세례를 받았을까. 이것은 마치 선문답과 같아서 수학 공식 같은 것을 떠올리면 절대 답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은 애들도 안다. 이런 경우도 있다. 빈 그릇 채워라, 뭘로 채울래?

아무것도 없는데 라는 대답이 나오면 역시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죽비를 피할 수 없다. 정말 아프겠다. 소리만 들어도 움찔거린다. 배우가 맞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맞는 느낌이다. 관객도 깨닫고 반성하라는 의미인가.

공명처럼 울리는 죽비소리. 다른 건 다 놓쳐도 다른 소리와 죽비소리를 구별해 낼 수 있다면 영화를 제대로 본 것인가. 빈 사발은 뜨끈뜨끈 쌀밥으로 채운다고 대답하면 화두를 푼 것일까.

손가락을 불 속에 집어넣고 굶기를 밥먹듯이 해도 터득할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도를 찾아 오늘도 선불교를 닦는 도인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왜일까.

속세의 명상 또한 늘고 있다.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이 길을 가게 하는가. 앞산에 꽃 피니 뒷산에 꽃 지고, 눈을 뜨니 눈을 뜬다와 같은 화두는 스핑크스도 풀 수 없는 영원한 수수께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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