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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 날씨라면 그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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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 날씨라면 그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0.05.20 08: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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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다. 아니 전부 준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자연이 없다면 인간은 살 수 없다. 공기며 물과 밥을 먹을 때 나는 자연의 감사함을 늘 느끼지는 않는다.

그러나 간혹 자연이 인간 곁에 없다면 과연 인간은 지속 가능한 종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자연을 보면서 하도 좋아 병이 날 정도는 아니어도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마음은 그것을 파괴하기보다는 보존하고 가꾸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다.

이런 한가한 생각을 하는 것은 먹고 살기에서 벗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늘 밥벌이에 대한 근심 걱정이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숙명을 감안 해도 지나친 면이 있다.

그렇다고 거기서 벗어날 생각은 없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싶지도 않다. 죽기 전까지는 살기 위해 먹어야 하는 현실은 때로는 답답하고 때로는 즐겁다.

이런 상반된 감정을 갖는 것은 어떤 때는 먹기 싫고 어떤 때는 먹으면서 행복감을 맛보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일어나자마자 커피 향을 느끼면서 작은 거실 사이를 부산하게 움직였다.

날씨는 거짓말처럼 맑게 개어 있었다. 천둥과 번개를 치면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던 창문 밖은 이제는 멀리 관악산은 물론 남산이나 뚝섬 뒤의 산까지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백 층이 넘는 건물이 온전히 보인다는 것은 ‘미세먼지 좋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흡족했다. 단지 안 보이던 것이 보였을 뿐인데도 마음은 이런 상태가 지속됐다. 자연에 아니 감사할 수 없다.

바이러스는 인간에게 끔찍한 공포를 주었지만 반면 이런 대기의 깨끗함도 동시에 선사했다. 아무리 나쁜 것도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라는 속성은 이번에도 여지없이 증명됐다.

동전의 양면처럼 한쪽과 다른 쪽은 다르지만 다른 것이 더 우월하거나 낮은 것은 아니다. 그러니 오늘 같은 날은 내기에서 졌다고 우울해할 필요는 없다. 로또 복권을 사면서 당첨되기보다는 떨어지기를 기대해도 상관없다.

커피가 식기 전에 어서 먹어야겠다. 먹을 때는 천천히, 라는 말을 경구처럼 언제나 되새기고 있지만 행동은 언제나 그 반대로 흐르고 있어 벌써 커피는 반쯤 비어 있다.

뜨뜻한 것이 목구멍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 위에 깊숙이 자리 잡으면 몸 전체에 향기가 배어 마치 선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누군가 다가와서 코를 들이밀고 냄새를 맡는다고 해서 화를 내거나 성난 표정으로 노려보는 대신 더 진한 향기를 뿜어낼 준비가 되어 있다.

어디론가 떠날 수도 있고 현재 자리에 머무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어떤 판단을 내리든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으므로 커피의 향연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리라.

전에도 그랬지만 특히 요즘에는 몰랐던 것을 알았을 때의 기분이 매우 삼삼하다. 아직 읽지 않은 책을 읽었을 때 그것이 명성에 비해 별 볼 일 없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목적을 위해 노력한 결과만큼이나 해냈다는 안도감을 주기 때문이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고민했던 수고는 말끔히 사라진다.

다시 눈을 슴벅이며 밖을 본다. 분주한 자동차의 행렬과 가을날을 연상시키는 파란 하늘이 높은 건물 사이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 정도 날씨라면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더 그래도 된다.

너그러운 마음이 한없이 넓게 펼쳐진 창공 속으로 달려나가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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