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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를 펴지 않고 쉬지 않고 호미질을 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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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를 펴지 않고 쉬지 않고 호미질을 해댔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0.05.18 09: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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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말하자면 나는 독사에 물리고 나서도 예정됐던 여행 일정을 전부 소화했다.

붕대도 무사히 풀었고 상처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말끔하게 나았다. 호들갑에 비해 결과는 미약했다. 그래서 조금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붕대를 휴지통에 던지면서 지었다.

시간은 모든 기억을 흐리게 하듯이 그것이 흘러가면서 나는 독사와 열십자와 붕대를 잊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기억 속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해마다 독사가 나타나는 계절이면 나는 그 녀석을 죽이지 않고 살려 둔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생긴 것이 사람의 기준으로 혐오감을 주고 물렸을 때 아픈 결과를 가져온다는 이유만으로 녀석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지금도 나의 생각이다. 멀리하고 피할 수는 있지만 혐오하거나 그로 인해 보이는대로 혹은 보이지 않아도 찾아서 잡아 죽여야 할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유해 파충류로 여겨 전문적인 땅꾼을 투입해 전국에 있는 독사들을 섬멸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수도 없거니와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은 환경학자가 아니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자연의 생태계는 종의 다양성으로 보존될 수 있고 그 다양성으로 인해 인간도 지속 가능한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 뱀의 후손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기를 바라는 것은 이런 소박한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가 암놈이었는지 수놈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수놈이었으면 짝을 만나 새끼를 만들고 그 새끼들이 또 새끼를 만들어 지금까지 어느 숲속 어느 들판 어느 계곡에서 유연한 산책길에 나서기를 바랄 뿐이다. 간혹 해가 나면 습지에서 나와 볕을 즐기면서 장기인 혀빼기 놀이를 했으면 싶다.

암놈이었고 새끼를 밴 상태였다면 무사히 새끼를 낳아 그 새끼들이 천적에게 잡히지 않고 부모를 닮아 거친 독을 품은 채 깊은 산속에서 쥐를 잡아먹고 굶어 죽지 않기를 바란다.

칠점사 역시 살모사의 일종이므로 이는 알이 아닌 새끼 형태로 자손을 세상에 내보내므로 출산 직후에는 모든 동물처럼 매우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 이것은 본능이 알려 줄 것이므로 내가 관여할 범위 밖의 일이다.

어쨌든 뱀뿐 만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에게 해를 주지 않는 그 모든 것이 인간과 더불어 지구별에서 공존하면서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런데 어떤 인간들은 그들이 스스로 자연사하기 전에 많은 곤충이나 동물 들을 일찍 저세상으로 보낸다.

물론 필요에 의해서라고 주장하겠지만 그런 것들이 좋게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면 개천가에서 지렁이를 잡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검은 봉지나 깡통을 옆에 놓고 열심히 땅바닥을 파다가 지렁이가 나오면 그것이 끊어지지 않도록 길게 위로 잡아 늘린 다음 가져온 봉투나 깡통에 집어 넣는다.

나는 어느 날 그런 장면을 오랫동안 지켜본 적이 있다. 그래 봤자 한 20분 정도이겠지만 그러는 동안 그들은 한 번도 허리를 펴지 않고 쉬지 않고 호미질을 해댔다.

서울의 개천에서 지렁이를 잡는 그들에게 다가가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지는 않았으나 짐작하는 데가 있었다. 지렁이가 사람 몸에 좋다는 신념을 그들은 갖고 있었다.

몸을 보신하거나 잃어버린 건강을 되찾는데 토룡탕만 한 것이 없다는 것이 그들이 땅을 파는 이유였다. 지렁이를 죽여서 내 몸을 보신하는 것은 독사를 보고 혐오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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