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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수효과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들판의 곡식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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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수효과는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들판의 곡식에게 돌아갔다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0.05.14 14: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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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를 감고 집으로 돌아왔다. 좀 처량했다. 여행 일정이 어긋난 것도 그렇지만 약초를 캐기는커녕 독사에게 물려서 병원 신세를 졌으니 신세 한탄을 할 만도 했다.

그날 오후 비가 내렸다. 추녀 끝에 빗방울이 모이더니 이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낙수효과를 보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들판의 곡식이 일 것이다.

한여름의 강한 태양 아래 고추 모가 시들어 들었는데 녀석들이 얼마나 반가울까 생각하니 그나마 기운이 좀 났다. 고추모 뿐만이 아니었다. 밭에 심은 곡식은 모두 물을 그리워 했다.

목말라 본 자는 안다. 물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래서 나는 우울한 마음을 떨치고 억지로 기분이 좋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괜히 병원에 갔고 병원에 갔어도 칼을 대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의 내부로 들어온 칼은 조직을 찢었고 갈라진 조직이 아물기 위해서는 보름은 지나야 했다. 의사는 넉넉잡아 20일이면 풀라고 했으나 나는 그 기간이 한 달보다 더 길다고 여겼다.

여름 휴가는 끝장났고 여름날의 추억을 기대했던 부푼 나의 가슴은 쪼그라들었다. 무었 보다 아내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여름 휴가만큼은 온전히 지내자는 것이 결혼 후 수년간 지켜온 약속이고 이 약속은 한번도 깨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금이 갔고 나는 그것이 실망스러웠다. 이해심 많은 아내는 집안의 이런저런 우환이 있는 것과 어쩔 수 없는 상황을 감안 해 별 내색은 안했지만 일정이 틀어진 것이 반가울 리는 없었다.

다음날 나는 결심을 했고 차의 시동을 걸고 예정대로 남쪽으로 출발했다. 자고 일어나니 다리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말하니 꼭 이상이 있기를 바랜 것 처럼 들리겠지만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독에 관한 어떤 몸의 변화도 감지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독사의 독은 이제 나의 걱정거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하루가 지나서도 이상이 없다면 이상이 없는 것이고 그것은 의사도 확인해 준 것이다.

그렇다고 붕대를 풀수는 없었다. 칼로 벤 상처는 아물어야 하고 아물기까지는 앞서 이야기한 시간이 필요했다. 식후에 주기적으로 먹어야 하는 항생제가 부담이 됐으나 대신 잡균을 제거해 줄 것을 믿었으므로 그것에 대한 거부감도 없었다.

운전하는데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물린 곳이 왼쪽 다리이기도 했지만 설사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오른쪽이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걷는데 조금의 불편도 없었다.

심리적인 것만 빼고 기능적인 면에서 그랬기 때문에 나는 의식적으로 다리를 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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