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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26 00:17 (금)
110. <아버지와 아들>(1862)- 막무가내의 비극적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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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아버지와 아들>(1862)- 막무가내의 비극적 종말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0.05.07 17: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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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세대 간 차이는 분명하다. 30년 세월은 아버지와 아들의 나이 차이와 엇비슷하다. 강산이 세 번 변할 정도의 시간이니 그 차이는 작지 않고 크다.

사회의 모든 것이 바뀌었고 바뀌고 있기 때문에 과거는 현재의 눈으로 볼 때 구식일 수밖에 없다. 특히 그 변화가 매우 빠르고 소용돌이칠 만큼 격변기라면 신식의 눈에는 그저 무시하거나 버려야 할 쓸모없는 존재일 뿐이다.

돌이켜보면 아들일 때 보았던 아버지와 아버지 때 보았던 아들의 행태는 이런 시간의 흐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아버지 니꼴라이와 아들 아르까디의 삶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아버지는 구식이고 아들은 신식이다. 그러니 사고방식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분명하고 그 차이는 극복하기보다는 넘기 어려운 장애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무한사랑으로 넘치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하기보다는 부담스러워한다는 점이다. 그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오랜만에 집으로 온다.

그는 혼자가 아니다. 털복숭이 친구 바자로프와 함께 왔다. 그런데 이 친구 바자로프가 물건이다. 여기서 물건은 좋은 의미라기보다는 괴짜이거나 타인을 이해하기보다는 자기중심적 인물이라고 봐야 한다.

바자로프는 귀족이면서 농노가 무려 200명이나 되는 아르까디의 집에 머물고 있다. 아버지가 군의관인 잡계급 출신이지만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거침없는 의견을 내고 자신과 반대되면 가차 없이 속물로 깎아 내린다.

▲ 아버지와 아들은 세대간 갈등을 보여주면서 당시 러시아 사회의 연애관을 여지 없이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재미있게 읽힌다. 특히 아르디카의 친구 바자로프의 언행은 여러모로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 아버지와 아들은 세대간 갈등을 보여주면서 당시 러시아 사회의 연애관을 여지 없이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재미있게 읽힌다. 특히 아르디카의 친구 바자로프의 언행은 여러모로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니꼴라이 집에는 어려울 때 동생을 금전적으로 여러 차례 도움을 준 형 빠벨이 같이 살고 있는데 바자노프와 사사건건 부딪치는 일이 잦다. 바자노프는 빠벨을 예사로 무시하고 깎아 내리기를 주저 하지 않는다. 객이 주인을 나무란다고나 할까.

그러나 주인 아들이 스승으로 모실 만큼 바자로프는 확고한 자기 주관이 있다. 자연과학은 물론 의학에도 해박하고 개구리나 물방개와 놀면서도 화학이나 물리학에 열중인 학구파다. 귀족의 자부심이 강한 빠벨도 그의 주장을 마냥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도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 해도 니꼴라이나 빠벨이 보기에 그는 설익은 풋살구에 불과하다. 철부지라고까지 하기는 뭐해도 치기 어린 젊은이라고는 충분히 부를만하다. 바자로프는 그 스스로도 니힐리스트라고 칭할 만큼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이론이나 사물을 부정한다.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고 아무도 존경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비판적으로 본다. 어떤 권위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이 그의 장기다. 제아무리 존경받는 원칙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런 것에 의문을 달면 ‘왜 그래야 하느냐’고 되레 대든다.

거만하고 뻔뻔하고 빈정거리는 태도가 대단하다. 낭만과 예술을 하찮게 보고 라파엘로 정도는 동전 한 닙의 가치도 없다고 단언한다. 니꼴라이가 뿌시낀을 읽는다고 요즘 시대에 낭만주의가 웬말이냐고 호통을 친다.

책임지지 않는 주장과 무장되지 않은 이론으로 걸핏하면 비웃으면서 상대를 가리지 않고 마구 덤빈다. 무조건 적으로 여겨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니 누가봐도 시건방 떠는 것이 분명하다.

빠벨은 그런 바자노프를 한심한 놈의 알량한 신념으로 깎아내린다. 바자로프도 지지 않는다. 귀족 늙은이라고 조롱을 예사로 한다. 상황이 이러니 말릴 사람도 없고 말려도 대책이 없다. 그러니 누가 건달이고 누가 삼류인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세대 간의 대립은 여기서 잠깐 멈추자. 잠깐이 아니라 아예 언급을 말자.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할 만큼 했기 때문이다.

이반 세르게예비치 뚜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은 세대 갈등이나 터무니없는 주장만 다루는 것은 아니다. 양념이 지나쳐 주제를 뛰어넘는 남녀 간의 사랑이나 애욕이 넘쳐 난다.

전부를 보지 않고 간추린 요점만 읽은 사람이라면 당시 러시아 사회의 남녀 간 애정이 어느 정도까지 왔는지, 그 흥미진진한 게임을 놓치게 된다. 세대 간 대립이라는 누구나 하는 말은 접어둘 수밖에. 악마 아닌 흥미진진한 디테일 같은 다른 큰 틀로 들어가 보자.

니꼴라이는 20살 남짓의 딸 같은 여자 페도시야를 부인으로 두고 있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고 언제나 점잖빼는 니꼴라이에게 이런 재주가 있었다.

정식으로 결혼은 하지 않았으나 두 사람 사이에 한 살이 채 안 된 아들 미챠가 있다. 아르까디의 배다른 형제가 되겠다. 페도시야는 한순간의 실수나 하녀일을 하면서 부인역까지 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식 부인과 손색이 없는 위치와 대접을 받고 있다.

그런 계모에 대해 아르까디는 조금 부끄러워하는 아버지와는 달리 아무런 편견이 없다. 뭐, 이 정도야 껌딱지 정도로 여기는 듯하다. 역시 ‘쉰세대’와는 다른 신세대다. 그래서 쇼킹하다고 할 만 장면이 연출돼도 놀라서는 안된다.

그 여자, 아버지 부인에 대해 아들이나 특히 아들의 친구 바자로프는 이상한 감정을 갖고 있는 듯하다. 여자로 대하고 기회를 보아서 어찌해 보려는 수작질도 한다. 시도하는 정도가 아니다. 실제로 바자로프는 그 여자와 긴 입맞춤을 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음란 행위를 벌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아버지의 형 빠벨도 그녀에게 흑심을 품고 있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는 점이다. 동생의 어린 부인을 유혹하는 우애가 남다른 형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죄책감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다만 바자로프를 연적으로 생각하는 기이한 행동을 벌인다.

그래서 자식보다도 어린 바자로프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이념이나 철학이나 사고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강조한다. 오로지 애욕의 결과다. 당연히 이 장면에서 바자로프의 죽음이 연상된다. 퇴역 장군과 총 한 번 쏜 적이 없는 바자로프는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상황은 거꾸로 흘러 빠벨이 허벅지 부상을 입고 짐승처럼 쓰러진다. 체면 확 구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빠벨은 결투란 그럴 수도 있다는 넓은 아량으로 얼렁뚱땅 넘어간다.

농도제 폐지나 사회적 문제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이던 두 사람의 대립에서 남의 여자( 단순한 여자가 아니다. 친구 아버지의 부인이며 친동생의 부인이니)를 놓고 벌이는 결투라니, 참 거시기 하다.

글로 하면 추잡한 자들이라고 표현할 만하다. 귀족이나 의사에서 난봉꾼으로 격하돼도 두 남자 다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당시 러시아의 관대한 애정행각에 비춰도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29살의 오딘쪼바 부인을 놓고 이번에는 아르까디와 바자로프가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런 황당함이라니. 부인은 다행히 남편이 사망해 자유로운 몸이니 그나마 이해할 만하다.

아르까디는 물론 바자로프와 서슴없이 어울리던 부인은 두 남자 가운데 바자로프 쪽에 몸이 더 기울었고 바자로프 역시 그녀에게 대시하는 기세가 아르까디보다는 앞선다.

아르까디는 오딘쪼바 부인의 여동생 까챠( 가짜의 오기 아님)에 관심이 깊다. 책의 도입부가 아무나 말하는 세대 간 대립이었다면 나머지는 모두 이런 지저분한 관계로 채워진다.

재미있고 쉽게 읽히므로 도스토옙프스키나 톨스토이를 버겁게 여긴다면 뚜르게녜프를 먼저 접하는 것도 괞찮겠다. 러시아 문학의 3대 거두와 가까워지는 쉬운 길이기 때문이다.

: 러시아가 경제 기반의 통로였던 농노제를 폐지한 시기와 책 출간 연도가 비슷하다. 그래서 주인공들이 이 문제를 자주 언급하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늦게 폐지됐다고는 하지만 오랜 기간 러시아 경제를 받쳐왔다는 점에서 농노제는 찬성과 반대 사이에서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사회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보면 재미가 더하다. 한편 아버지 못지않게 어머니의 등장도 빼놓을 수 없는데 비록 조연이라고는 하지만 지극한 모성애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기는커녕 되레 더 심해진다.

결투에서 죽었어야 할 바자로프를 살린 작가는 후반부에 그의 죽음을 배치하면서 모성을 자극하고 독자들의 흥미를 급하게 끌어 올리고 있다.

환자를 돌보다 감염병으로 사망한 그는 죽기 전 오딘쪼바 부인을 애타게 찾는다.

죽음 앞에서 니힐리스트의 선봉에 섰던 그도 여자의 따뜻한 위로와 눈길 한 번이 사상이나 학식보다도 더 중요했던 것이다. (참고로 바자로프의 여성관은 지금 시각으로 보면 성인지 감수성이 제로에 가깝다. 여자를 한 인격체로 보기보다는 인물이나 몸매로 국한하고 몸이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당장 해부대에 올려놓겠다고 떠들어 댄다. 여자의 자유 사상을 못 견뎌 하는데 그 이유라는 것이 고작 그런 사상에 물든 여자는 한결같이 못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돈 많은 늙은이와 결혼하는 것은 묘한 것이 아니라 현명한 행동이라는 것, 등등) 당시 진보주의자의 여성관이 이 정도였다니. 여성에 관한 더 끔찍한 표현들은 너무나 많으니 관심 있는 독자들은 정독해서 읽어 보시길)

마음씨 좋은 부인은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는 너그러움을 보여준다. 이후 그녀는 어떤 남자와 결혼해서 마을을 떠나고 형 빠벨도 모스크로 간다.

아르까디는 오딘쪼바 부인의 동생 까짜와 결혼한다. 그런데 입이 떡 벌어지는 것은 단독 결혼식이 아니고 합동결혼식이다. 아버지와 함께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식을 올렸으니 이런 코미디 같은 재미있는 설정이 어디 또 있을까. 일삼아, 혹은 심심할 때 읽어 볼 만한 책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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