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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 스파르타쿠스(1960)- 옛날 옛적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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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8. 스파르타쿠스(1960)- 옛날 옛적에는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0.05.05 1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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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일은 대개 그러려니 한다. 옛날이니까. 더 오래된 옛날 일은 호기심이 일기도 한다. 저럴 수도 있구나, 끌끌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로마 시대의 일이라면 ‘로마니까’ 하고 수긍한다. 하도 오래전 일이라 사람들은 남의 일처럼 말하면서 지금은 얼마나 행복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스파르타쿠스>는 그런 옛날이야기다.

스파르타쿠스( 커크 더글러스)는 13살 때 살아 있는 지옥으로 불리는 리비아 광산으로 팔려 왔다. 다른 사람에게 속해있었던 그는 다른 노예들과 마찬가지로 노예제가 사라지기를 꿈꿨다.( 그러나 그 꿈은 2,000년 후에나 가능하다)

이제 성인이 된 그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고된 노동에 시달린다. 동료 노예들은 하나둘 쓰러져 죽는다. 쓰러진 자에 눈길을 돌리거나 동정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러나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반항적 인물이 꼭 있기 마련이다. 스타르타쿠스는 내버려 두라는 경비병의 발목을 물어뜯는다.

그는 얻어터지고 검투사로 팔려 간다. 젊은 귀족 여인들은 ‘반항끼’ 있는 그를 거대한 몸집의 흑인과 싸우도록 점찍는다. (정확한 그들의 눈썰미는 칭찬받을 만하다)

왜 여인들이 그런 악취미를 가졌느냐고 묻지 마시라. 그 대신 그녀들 나름대로 스트레스가 있고 그것을 푸는데 싸움 구경만큼 좋은 것은 없다는데 이해심을 가져보자.

검투사 양성소에서 지옥 같은 훈련을 견뎌내고 살아 있는 병기로 성장한 그들의 몸은 종마와 같이 잘 가꾸어졌다. 그들의 벗은 몸이 여인들의 환호 속에 엎치락 뒤치락 불꽃이 일렁인다.

말 그대로 죽기 살기다. 싸움에서 진자는 죽고 이긴 자는 산다. 주인공이 위기에 몰렸다. 흑인의 삼지창이 목을 겨누고 여인의 엄지손가락은 아래로 향했다. 그러나 흑인 노예는 이를 거부한다. ( 왜 그랬는지는 불분명하다. 살생을 거부하겠다는 강한 의지만이 이글거릴 뿐이다. 대단한 흑인이다)

▲ 노예들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죽음을 옆에 끼고 있는 그들의 사랑은 절박하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더 애절하다. 그들에게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사랑일 것이다. 그것은 죽음도 초월하기 때문이다.
▲ 노예들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죽음을 옆에 끼고 있는 그들의 사랑은 절박하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더 애절하다. 그들에게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사랑일 것이다. 그것은 죽음도 초월하기 때문이다.

흑인의 아량으로 살아난 스파르타쿠스를 눈여겨보는 여인 바리니아( 진 시몬스)는 같은 노예의 처지이면서 그를 동정한다. 아니 사랑한다. 검투사와 여인의 사랑이 뭐 대수냐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두 사람은 비록 노예이나 남녀 주인공이기 때문에 권력자들이 모두 죽고 나서도 끝까지 살아남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예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지금의 기준으로 볼 때 도덕적으로 귀족보다 훨씬 우월하다. 그뿐 아니라 사랑도 고차원이라 돈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도 억지로 떼어 낼 수 없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검투사에게 던져진 하룻밤 여인 바리니아에게 난 짐승이 아니다, 그러니 함부로 대할 수 없다고 그녀를 거절하는 스파르타쿠스는 인간의 깊은 내면에 숨은 양심을 들추어낸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참담한 상황에서 이같은 억제의 힘은 과연 대단하다.

몸이 아무리 더럽혀 졌어도 이런 남자에게 끌리지 않을 여자가 있을까. 그 순간 남녀는 죽음으로도 떨쳐 낼 수 없는 질긴 끈으로 연결됐다.

살아남은 스파르타쿠스는 반란을 일으킨다. 검투사를 모으고 노예들을 끌어들여 탈출한다. 로마를 정복하겠다는 야심 같은 것은 없다. 그저 고향으로 가고 싶을 뿐.

그러나 작정했던 해상탈출이 어렵다. 더구나 로마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왜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허울뿐인 수비대는 졌어도 막강한 로마군을 노예군이 상대하기는 벅차다.

노예들은 박살 났다. 주인공도 잡혔다. 노예 소탕 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됐다. 반항의 끝은 이렇다는 것을 본보기로 보여주기 위해 로마 원로원은 노예들을 길가 십자가에 죽을 때까지 매달아 놓았다.

절대 권력자 크라수스( 로렌스 올리비에)는 바리니아의 사랑을 받고 싶다.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그녀를 원할 수도 있지만 같은 남자 대 남자로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해 보고 싶다. 그가 갖기 보다는 그녀가 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바실리아는 다 가진 자 크라수스를 거절한다. 그 남자에 그 여자다. (흑인의 용기만큼이나 엄청나다) 그리고 매달린 그를 보고 너를 사랑한다고 외친다. 아기를 번쩍 들어 올린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는 내려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더이상 극적인 장면은 연출되지 않는다. 떠나는 여인을 뒤로 하고 영화 역시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죽어서 진정한 자유인이 될 것이다.

한편 로마 귀족은 이런 말을 한다. 공적으로는 신을 믿지만 사적으로는 안 믿는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이 말은 여전히 귓전에서 맴돈다. 과연 신은 어디에 있는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믿음이 없는 것을 꾸짖는 종교에게 과연 신은 있는지, 있다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귀족과 노예 가운데 누가 더 인간에 가까운지 판단을 내려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국가: 미국

감독: 스텐리 큐브릭

출연: 커크 더글러스, 진 시몬스, 올리비에 로렌스

평점:

: 노예들이 로마 권력층보다 우월한 것은 도덕성이나 양심이라고 언급했다. 의리나 용기에서도 그렇다. 반면 권모술수에서는 한발 뒤진다.

노예의 반란이 실패로 끝나자 반란의 두목이 누구인지 색출하는 작업은 자연스럽다. 궁중 암투에 노련한 원로원의 의원이라면 이때 어떤 수를 써서라도 자신이 두목으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갖은 술수를 동원할 것이다. 그런데 스파르타쿠스는 그렇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 내가 그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극적인 순간에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수천 명의 노예들이 한목소리로 내가 스파르타쿠스라고 외치고 있다. (결국 발각되겠지만 이런 가상한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고 팔리는 노예들에게 이런 적극적 연대의식은 과연 어디서 뿌리를 두고 있는가, 경외심마저 든다. 비록 영화라 할지라도)

한편 크라수스의 총애를 받았으나 반란군 편에 섰던 노예 안토니우스의 최후도 볼만하다. 그는 형제처럼 지낸 스파르타쿠스의 칼에 죽는다. 두 사람이 결투 전 서로 말을 맞춰 보지만 어긋나 결투는 피할 수 없다.

안토니우스는 자기가 죽이겠다고 하고 스파르타쿠스 역시 내가 너를 죽이겠다고 한다. 얼핏 상대가 죽어야 내가 사는 결투에서 형제애는 어디에?하고 반문할 수 있으나 이 결투의 승자 역시 살지 못하고 죽는다.

그래서 둘이 서로 죽이겠다고 나선 것인데 산자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 때문이다. 한칼에 죽는 고통이 서서히 죽는 고통보다 덜하기에 서로 그런 고통을 덜어 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런 피보다 진한 우정을 로마의 귀족들은 나눌 수 있을까. 노예에게는 있고 귀족에게는 없는 그 무엇이 로마 멸망의 원인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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