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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젊은 예술가의 초상 >(1916)-가는 길에 축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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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젊은 예술가의 초상 >(1916)-가는 길에 축복을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0.04.24 08: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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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어떻게 태어나는가.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은 한 사람이 예술가로 성장하기까지 내면의 고백은 어느 정도 강도여야 하는지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세상에 직업은 많고 이런저런 다른 길로 갈 수도 있는데 왜 하필 예술인지에 대한 고민은 다른 직업보다 그것의 종류 역시 다른가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성장 과정이나 학교생활, 주변의 권유, 타고난 재능 그리고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적절히 활용한다면 예술가의 길도 다른 길과 마찬가지로 평생 지고 가야 할 짐으로 정해질 수 있는지도 궁금했다.

예술은 고상한 것 같으면서도 누구나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것 같다는 생각은 지금도 과히 틀리지 않는다. 따라서 그 길은 험난하고 가시밭길이 아니겠느냐고 지레짐작을 해볼 수는 있다. 이는 예술의 영역이 여전히 신비에 싸여있기 때문이 아니라 ‘먹고사니즘’에 대한 인식이 뿌리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을 읽으면서 주인공인 스티븐 디덜러스는 과연 이런 생각을 하고 그런 다짐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직 젊은 나이에 ‘꼰대 ’처럼 생계나 걱정하는 것이 우습지만 스티븐은 16 살에 이미 창녀와 그 일을 치른 젊은이가 아니던가. 그런 일에는 당연히 돈이 들고 돈은 필요할 때마다 쓰라고 늘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당시 스티븐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부유할 때 좋은 교육을 받았고 그러지 못했을 때 다른 학교로 전학 갔던 일이나 집까지 옮겨야 하는 형편에 몰린 경험이 있으므로 스티븐이 가졌을 그런 순결한 결심은 어디서 오는가. 용기인가 만용인가, 그도 아니면 객기의 결과이거나 혹은 실수인가.

더구나 그는 성적이 우수하고 신심이 깊었으므로 교장으로부터 성직자의 길을 제의받기까지 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이 모두 보장된 성직자의 길을 그가 뿌리친 것은 청년의 반항심인가, 아니면 그것보다 예술이 더 좋아 보였기 때문인가.

그도 아니라면 믿지 않는 것을 위해 봉사할 의욕이 없었기 때문인가. 이런 숱한 의문은 독자뿐만 아니라 스티븐이 일찍이 가졌던 것으로 우리는 그 과정을 따라가면서 이런저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봐야 한다.

그것이 스티븐을 이해하는 것, 아니 제임스 조이스를 해석하는 첫 관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스티븐은 작가의 분신으로 이 작품은 자전소설이라고 누구나 말하고 있으니.

그러나 그 과정을 따라 가는 것은 쉽지 않다. 스티븐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서 무엇을 먹고 저녁에는 어떤 생각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지가 이야기가 아닌 자기 내면의 고백 같은 것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글쓰기 수법이 ‘의식의 흐름 ’이라나 뭐라나 어쨌든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무엇을 읽었는지 도통 기억이 없다 .

단편으로 엮어진 <더블린 사람들 >을 읽으면서 제임스 조이스도 어렵지 않다거나 그 이름에 지레 겁먹은 것을 창피하게 여겼던 사람도 <율리시스 > 못지않다고 혀를 내두를 만하다.

대개는 그런 선입견이나 사후 입장을 가지고 시작했으리라 믿고 그 시작이 헛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책장을 넘기는 인내심을 가져보자. 그러다 보면 그가 성직자의 길을 포기하고 예술가로 살아가기로 작정한 친구 크랜리와의 대화 장면에 이르는 순간을 맞게 된다.

더구나 이때쯤이면 궁금했던 부분을 시원하게 풀어 주는 작품 해설이 기다리고 있다. 기연미연했거나 어쩔 수 없이 그냥 건너뛴 부분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듣다 보면 이제 덮어도 된다는 편안한 상태에 이른다. 여기까지만 봐도 책의 중요한 내용은 거의 나왔다.

친절한 후기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몇 마디 덧붙여 보자. 주인공은 어린 시절은 그냥 그렇다 치고 학교에 들어갔을 때 공부는 최상위였다.

그러나 조용하면서도 자기주장이 있어 아이들 손에 의해 하수구 통에 쳐 박히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경험이 있다. 물론 이 경험이 좋을 리 없다. 돈이 많이 드는 기숙 학교생활은 아버지의 파산으로 이사와 함께 끝나고 새로운 학교의 적응이 기다리고 있다.

▲ 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사람들은 자신의 앞날을 위해 무언가를 결정한다. 스티븐처럼 성직자의 길이 아닌 예술가의 길을 가고자 결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 결정은 고심의 결과물이다. 그 앞길에, 젊은이들의 앞길에 축복의 향유를 뿌려주고 싶다.
▲ 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사람들은 자신의 앞날을 위해 무언가를 결정한다. 스티븐처럼 성직자의 길이 아닌 예술가의 길을 가고자 결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 결정은 고심의 결과물이다. 그 앞길에, 젊은이들의 앞길에 축복의 향유를 뿌려주고 싶다.

그 학교 역시 성경이니 고해성사니 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창녀와 함께 한 육체적 쾌락은 심한 정신의 고통을 동반한다. 주변 분위기가 다 그렇다. 입만 열면 죄를 뉘우쳐야 하니 그렇지 않아도 쪼그라드는 가슴은 더욱 새가슴이 된다.

마침내 스티븐은 고해성사를 위해 성당 한쪽의 문을 옆으로 밀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런 일을 했느냐고 되묻고 따지고 꼬집고 하는 양심의 가책은 어린 영혼을 심하게 흔든다.

죄를 지었다는 것, 그래서 속죄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이 모든 고통 속에서도 고요는 언제나 그의 외피였고 학교장은 그런 그에게 성직을 제의한다.

부르심은 전능하신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는 최고의 영광이고 지상의 어떤 왕이나 황제도 사제가 갖는 권능은 갖지 못한다고 꼬드긴다. 하늘에 있는 어떤 대천사도 어떤 성자도 심지어 동정녀 마리아도 사제와 같은 권능을 가지지 못한다고 부추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스티븐이 거절했다는 것은 앞서 말했다 . 신앙심이 사그라들었기에 서품의 성유를 몸에 바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친구 크랜리와의 대화, 바닷가 소녀, 삶이여 오라, 내 영혼의 대장간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내 종족의 의식을 벼려 내러 간다 까지. 여기서 더 이상의 설명은 사족에 불과하다 .

그러니 궁금증이 있는 독자들은 별로 두껍지 않지만 장편소설인 것은 확실한 이 책을 주저 없이 들어보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일단 손에 들어야 한다.

: 제임스 조이스의 고향은 아일랜드 더블린이다. 식민지 조국의 현실은 그의 모든 것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지식인들처럼 독립을 위한 모종의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대신 더블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실대로 쓰려고 주력했다.

그 이야기는 미화되거나 독립을 고취하는 것이 아니어서 끊임없는 소송 위협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러니 고향 더블린을 떠나서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로 유랑하면서 30 년 훌쩍 넘게 귀향하지 않은 것이 이해될 만도 하다.

이런 행동이 고향을 잊어버리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되레 고향에 대신 그리움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더블린 삼부작으로 불리는 <더블린 사람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율리시스 > 등이 더블린과 연관이 있고 더블린을 빼고서는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모든 감정과 이성과 주변을 배제하고 오직 순수함만으로 예술을 선택한 스티븐의 결정에 대해 우리는 왈가왈부 할 수 없다. 한 사람이 심사숙고해 내린 결정은 그 자신 외에 누구도 제대로 된 평가를 내릴 수 없다.

비록 그 결과가 좋든 나쁘든지 간에. 무엇이 되고자 하거나 무엇을 하려고 하는 젊은이들은 누구나 스티븐 디덜러스가 될 수 있고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감수성의 혁명으로 빠져드느냐, 마느냐 역시 각자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

모두 5 장으로 이뤄져 있으며 4 장이 서사가 가장 활발하고 5 장은 가장 지루하다는 의견이 있다면 거기에 전적으로 동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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