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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9 17:22 (금)
칠점사와 마주했던 내소사의 어느 가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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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점사와 마주했던 내소사의 어느 가을 날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0.03.16 16: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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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하는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사라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말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소똥구리의 행방불명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전격적으로 사라졌다고 표현해도 좋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 녀석은 하루아침에 모습을 감췄다. 이런저런 이유 가운데 내가 신뢰하는 것은 소똥의 오염 때문이다. 똥의 오염이라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대꾸할 수 있다.

그러나 똥도 오염된다. 건강한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소죽만 먹던 소가 항생제가 듬뿍 들어간 사료를 먹고 싼 똥은 건강할 수 없다, 그 똥에서는 소똥구리도 자랄 수 없다. 결국은 환경 오염 때문에 소똥구리가 사라졌다고 할 수밖에 없다.

코로나 19처럼 어떤 감염병 때문에 그렇게 됐을 수도 있다. 이를 테면 모든 등껍질을 가진 곤충들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퍼졌을 수도 있다. 여기서 사라진 이유를 밝히는 것은 무의미하다. 주제넘은 짓이기하다.

밝힐 수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다. 다만 존재했던 것이 사라졌을 때 오는 무력함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어린 시절 동화같은 꿈을 꾸게 해 주었던 소똥구리는 친구와 다름없었다.

녀석은 참나무에서 흔히 발견됐던 집게벌레와는 달리 전혀 사납지 않았다. 손에 올려놓으면 물기는커녕 간지럽게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큰 뿔을 무슨 무기처럼 들고서 말이다. 그렇지만 녀석은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대상이었다.

또 냄새도 나지 않았다. 똥을 가지고 노는 녀석인데 되레 똥 냄새보다는 어떤 향수 같은 것을 뿌려 댔다. 녀석이 떠난 손을 코에 대면 그런 냄새가 났다. 손을 비볐을 때 나는 닭의 똥 냄새는 확실히 아니었다.

또 색은 어떤가. 온몸의 빛나는 검은 색은 검은색도 생명의 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등껍질의 빛은 어둠을 밝히는 등불처럼 밝고 환했다. 녀석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동물원이 아니라 시골길 소똥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잠시 기쁜 마음이 들 것은 틀림없다.

녀석을 죽인 경험은 없다. 내가 기억하는 한 살아서 움직이던 것을 죽여서 더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하지 않았다. 그것에 대해 지금 나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개구리는 무지막지하게 죽였다. 회초리처럼 길고 가는 나무를 만들어 점프해서 막 착지한 순간 등을 세게 내리쳤다. 그때가 개구리가 방심할 때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 순간을 기다렸다. 개구리는 사지를 쭉 뻗으면서 심하게 떨었다. 그리고 곧 죽었다.

먹기 위해서 죽이기도 했지만 장난삼아 그렇게 했다는 것을 밝힌다고 해서 개구리에게 미안한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로 좋지 않은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은 소똥구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소똥구리가 개구리보다 더 친해서가 아니다. 왠지 그것들은 죽여서는 안되는 것으로 여겼다. 가지고 놀다 싫증 나면 숲으로 들어가도록 내버려 두거나 아니면 멀리 집어 던지기는 했다.

발로 밟지 않고 손으로 내팽겨 치지않은 것은 그렇게 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뱀은 흉측해서 죽였고 간혹 사람을 물기 때문에 죽였다.

죽인 생명들은 겨울이 가고 지금처럼 봄이 오면 가끔씩 나 자신을 후회하고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새싹조차 밟기를 피해서 가는데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죽일 용기는 이제는 없다.

그래서인지 칠점사가 왼쪽 정강이 아래쪽을 물었어도 나는 그 뱀을 죽이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내소사의 어느 가을날이었다. 단풍이 지고 바람이 제법 불 때 나는 오래 묵은 절을 찾았다. 신심이 깊어서라기보다는 산이 좋아서였고 좋은 산에는 언제나 절이 있었으므로 가는 김에 한 번 둘러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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