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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김강사와 T교수>(1935)-양심과 생존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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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김강사와 T교수>(1935)-양심과 생존사이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0.03.15 1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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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과 생존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옳고 그름, 선과 악, 도덕과 비도덕은 멀리 있지 않다. 어렵지도 않다. 한 뼘 정도라서 여반장이다. 김강사 김만필은 한 때 열혈남아는 아니어도 청춘의 뜨거운 피가 흘렀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진보적 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상운동도 했다. 그러나 생존 앞에서는 다 부질없었다. 먹고 나서야 진보인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동경제국대학에서 공부했고 독문학과 성적도 우수했으나 돌아온 식민지 조선은 일자리 구하기다 녹녹치 않았다.

여기저기 수소문 했고 찾아 다녔고 취업 청탁을 했다. 구직 기간 일 년 육 개월은 짧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일자리를 구했다. S전문학교 강사자리가 그가 고국에서 구한 첫 직장이다.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고 일본의 N 교수, H과장, 학교장 등의 도움 때문에 가능했다.

비록 일주일에 두 번 출근하고 수업시간도 겨우 네 시간에 불과했지만 강사 자리를 얻었으니 그는 생존의 길에서 승리의 길로 한 발 자국 다가선 것만은 틀림없다. 교문을 들어설 때 그는 기쁨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마나 애타게 그리던 직장이었던가. 교장실에 들어가 인사를 하고 학생들 앞에서 정식으로 소개도 받았다.

더구나 자신이 조선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교원이 됐다는 교장의 말을 듣고는 감개무량할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 대학시절 문화비판회의 멤버로 활동했던 일이며 자신이 경멸했던 N 교수를 찾아가 취업청탁을 했던 일, 신문에 독일좌익문화운동을 소개하기도 했던 일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식인이란 얼마나 많은 인격을 갖고 있어야 하는가, 이중인격으로는 터무니없다. 적어도 삼중, 사중, 오중, 육중, 칠중, 팔중, 구중의 중첩된 인격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이런 되먹지 못한) 생각이나 말 것을.

강사 초기부터 이런 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하다. 그럴 거라면 차라리 룸펜 생활을 더 연장하는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어렵게 얻은 직장이었으나 만필은 좀처럼 정을 붙이지 못한다.

하라는 대로 하고 시키는 대로 하는 대신 나름대로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T 교수처럼 활력이 넘치기 보다는 우울하다. 이런 저런 눈치를 보고 인격을 시험하고 이중의 감정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자신의 의견을 내놓지 못하는 비겁함의 연속이다.

직장생활이 호락호락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짐작했지만 생각보다 고뇌는 깊다. ‘미생’의 장그래처럼 진심과 성실만으로는 견고한 조직생활을 해 나갈 수 없다.

학교는 교장과 H학과장 C강사 그리고 난체하는 T 교수 등 넘어야 할 산이 첩첩하다. 그 중 T 교수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친절하게 구는 것 같지만 속내를 알기가 어렵다. 학교 분위기며 학생들 다루는 법 등을 알려 주는데 그 의도가 의심스럽다.

실력은 그렇다 쳐도 그의 처세술은 대단하다. 그는 어떻게 알았는지 김강사가 일본에서 공부할 때 진보 조직에 가담한 것을 소상히 꿰고 있다. 그러나 김강사는 그런 과거가 지금의 자신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 내세우지 않을뿐더러 인정조차 않고 있다.

어느 날 T교수가 조심하라던 학생 스즈키가 집으로 찾아왔다. 그도 T교수처럼 자신의 과거를 다 알고 있다. 그러면서 진보적 모임을 꾸리려고 하는데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

김강사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면서 스즈키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면서. 바쁘기도 하겠지만 실상은 그런 모임에 나가는 것이 자신의 생존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 들어서였다.

현재 위치에서 그러한 소문은 불리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그는 심사가 이만 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다. 스즈키는 그러한 사실을 T 교수에게 들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에 김강사는 스즈끼가 T교수의 스파이라는 생각으로 그를 경계하고 있다. 스즈끼를 만난 이후 그의 학교생활은 더 우울해  졌다. 과거 전력이 드러나고 이에 따라 그의 행동은 더욱 움츠러들었다.

사람들 모두는 그에게 손가락질 하는 것만 같아 동료와 말하는 것조차 피하게 됐다. 자연히 교장이나 H학과장을 찾아 가는 일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 그는 학교 내에 파벌이 형성됐고 교장과 T교수 일파가 대가리를 휘젓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시간은 지나 눈발이 휘날리는 겨울이 왔다.

언제나 친절한 T 교수가 오늘도 예외 없이 다가와 하는 말이 지난번에 내가 과장상자 들고 간 것을 알지 않느냐, 세상은 다 그런 것이다. 교장도 별 거 아니니 연말 핑계로 과자상자나 사가지고 가라고 충고한다. ( 그 전에 그는 찻집에서 자신이 교장에게 추천한 사람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김만필이 생각하기에도 H 과장의 지시를 교장에게 전달한 것은 T교수가 틀림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독일신흥작가 군상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끄집어내면서 자신의 진보활동 내역을 추켜세웠다. 그것은 칭찬이라기보다는 위협이나 협박에 가까운 것이었다. 작금의 상황에서 김만필의 그런 과거는 도움이 되기보다는 해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 어렵게 직장을 잡은 김강사는 그러나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 자신의 학창시절 진보활동 사실이 드러나면서 자꾸 움츠러 든다. 자신을 소개해준 교장이나 학과장에게 변변한 과자상자하나 선물하지 못한다. 그는 식민지 조선 지식인의 나약함, 비겁함을 드러낸다.
▲ 어렵게 직장을 잡은 김강사는 그러나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 자신의 학창시절 진보활동 사실이 드러나면서 자꾸 움츠러 든다. 자신을 소개해준 교장이나 학과장에게 변변한 과자상자하나 선물하지 못한다. 그는 식민지 조선 지식인의 나약함, 비겁함을 드러낸다.

친절인지 조롱인지 분간 할 수 없어 내키지 않았으나 김강사는 그가 말한 대로 명치옥에 가서 서양과자 한 상자를 사서 윗덮개에 교장이름을 쓰고 그 아래에 자신의 명함을 넣었다.

그러나 그는 망설인다. 창피함을 떠나서 이 과자상자가 교장의 불쾌한 마음을 누그러뜨릴지 아닐지도 모르고 이 사실을 T교수가 알면 조소만 살 것이라는 또 다른 감정에 시달리다 결국 과자를 교장이 아닌 먼 친척에게 주고 만다.

그럭저럭 동기 휴가도 지났고 새 학기가 찾아 왔다. 그러나 김만필은 새로운 각오나 기분 대신 피곤이 몰려왔다.

T교수는 자신의 조언을 듣지 않은 것을 나무라고 동정하면서 이번에는 H과장을 한 번 찾아 가라는 말을 했다. 그러면 시간도 더 얻을 수 있다는 말과 함께. 그 말을 듣고 불안해 견딜 수 없었던 김만필은 그 날 밤에 H과장을 찾았다.

H과장은 그를 보자 조선 사람은 배은망덕한 인간이라고 면전에서 야단을 쳤다. 그리고 자신을 속인 것을 남의 얼굴에 똥칠을 했다는 표현으로 꾸짖었다. 사상에 문제가 없다고 하면서 자신을 감쪽같이 속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김만필은 풀이 죽기보다는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것처럼 펄쩍 뛰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다. 사상 인지 뭔지 그건 천만의 말씀이라고. 그 때 이웃 방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면서 벙글벙글 미소 짓는 T 교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 주인공 김만필은 우유부단하다. 사상 전력을 인정하지도 못하고 그것을 저주하지도 못하고 후회하지도 않는다. 숨기는 데만 급급하다.

대놓고 나 이런 행동했다고 당당하지 못한 것은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고 그 이후에도 그렇기 때문이라는 것은 앞서도 밝혔다.

그렇다면 과거를 반성하고 개과천선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다.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숨기더라도 후회할 필요까지는 느끼지 못했기 때문인지 김만필은 지식인의 주저함, 나약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김강사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공부한 저자 유진오는 경성제국대학 예과와 법문학부의 수재였다고 한다. 어쩌면 김강사가 그 자신의 분신인지도 모른다.

그는 지식인의 본분과 내면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작품에 이를 반영했다. 불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도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못하는 소시민적 이중적 지식인의 한계가 작품 곳곳에 드러나 있다.

처세술에 통달하지도 못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시하지도 못하는 주저함은 양심이라는 옳고 그름의 문제에 부딪쳤기 때문인가.

1927년 ‘조선지광’에 <스리>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와 프로레타리아 전성기에 이효석과 함께 동반작가로 활동했다. 해방 후 유진오는 제헌헌법의 기초자, 신민당수로, 학자로 현대사의 굵직한 흔적을 남겼다. 창씨개명은 하지 않았으나 친일의 흔적은 옥의 티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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