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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29 22:32 (금)
104. <장삼이사>(1941)-용서 받지 못한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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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장삼이사>(1941)-용서 받지 못한 죄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0.03.08 17: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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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젊은 청춘들이라면 깜짝 놀라겠지만 기차에서 마구 담배 물던 시절이 있었다. 통로나 화장실 이야기가 아니다. 몰래 숨어서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객실에서 버젓이 가능했는데 앞자리 뒤에 재떨이가 스테인리스로 장착돼 있었기 때문이다. 대놓고 피우라는 것이다.

어렵게 자리를 잡으면(1980년 당시 비둘기호는 지정 좌석이 아니라 길게 줄 서야 했다. 마치 코로나 19 마스크를 사기 위해 그러는 것처럼.) 안도감으로 담배에 손부터 갔던 기억이 새롭다.

연기에 대한 어떤 미련도 없었고 주변 사람에 대한 아무런 이해가 없었고 미안한 감정은 당연히 생기지 않았고 그런 것에 대해 누구도 뭐라 하면서 대들지 않았다.

내리고 타고 배웅하고 마중하고 앉을 사람은 앉고 서 있는 사람은 서고 대충 정리가 되면 나는 (최명익의 <장삼이사>에 나오는 관찰자처럼.)담배 연기를 길게 품으며 늘 이 많은 사람들이 대체 어디를 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지금도 그렇다.)

다들 나처럼 목적지가 있을 테지만 한 사람 한 사람 잡고서 가는 곳이 어디인지, 무슨 일 때문인지 알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인생에 대한 여러 의문과 호기심이 꼬리를 물기 마련이다.

객설하고 그 당시 담배를 마구 피웠다고 해서 객실 바닥에 침까지 허용되지는 않았다. 휴지를 마구 버리지도 않았고 공연히 옆 사람에게 시비 걸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라 뺏긴 식민지 시대에는 달랐다. 담배는 물론 침도 휴지도 마구 버렸고 ( 얼마나 많으면 수북이란 표현을 썼을까.)사람을 앉혀 놓고 조리돌림을 했다.

저렴한 삼등칸은 매우 혼잡하다. 기차가 어디로 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내가 가는 곳도 나와 있지 않다. 관찰자인 나는( 이런 식의 소설 수법을 일인칭 관찰자 시점이라고 배웠다.) 붐비는 기차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주의 깊게 지켜본다.

“이 중에는 남 모를 설움과 근심 걱정을 가지고 아득한 길을 떠나는 이도 있으려니.”

이때 모자 대신 목도리를 머리에 감은 한 농촌 젊은이가 제 버릇 개 주지 못했는지 가래를 그러모아 힘있게 탁하고 통로 쪽으로 침을 날린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지금처럼 코로나 19가 만연한 상황이었다면 기차 안 사람들은 모두 집단 발병했을 것이고 그들은 사방으로 퍼져 슈퍼전파자가 됐을 터.)

날아간 방향은 바닥이 아니라 어느 중년 신사의 구두코에 정확히 떨어졌다. 몰랐으면 다행인데 구두의 주인은 그것을 보았다.

기분 나쁜 그는 이리저리 흔들어 보지만 매끄럽지 않은 구두와 오래 응축된 덩어리는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쿵쾅거리고 뛰어봐도 별수 없다. 그것을 털어 내기 위해 안간힘을 쓸수록 비말의 피해는 고스란히 주변이나 나에게도 떨어졌다.

그렇다고 그 중년 신사를 나무랄 수 없었다. 그는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실수한 농촌 젊은이에게 미안하지 않느냐, 자꾸 되묻고 있다. 화가 났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확실히 인식시켰으나 정작 가래를 날린 청년은 모욕감으로 천장만 바라보고 있다.

작은 소동은 시간이 지나 잠잠해졌다. 주위에 있던 당꼬 바지나 가죽 재킷, 곰방대 노인( 이름은 나오지 않고 이런식으로 표현했다.) 등은 구두에 침을 맞은 두꺼비 인상의 ( 최명익에 의하면 그는 뒤룩거리는 눈, 너부죽한 입, 언제나 굳은 침을 삼키듯이 불럭거리는 군턱, 두드러진 특징만 그리는 만화가라면 안 그려도 무방한 극히 존재가 모호한 코를 가진 뚱뚱한 배를 가졌다.) 중년 신사가 포주라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그의 모습을 좀 더 살펴보면 이마는 벗겨지고 머리털은 빈약하고 눈은 충혈됐다.)

고량주를 먹고 미륵불이 연화대에서 고꾸라질 듯하다가 깨어나서 여인을 돌아보고 안심한 듯이 기지개를 켜는 사내는 포주의 전형이라는 것이 있다면 딱 어울릴 법하다.

그가 변소로 가자 그와 함께 있던 여자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쏠린다. 당꼬 바지, 가죽 재킷, 실수한 젊은이, 곰방대 노인들은 서로 돈벌이에 색시 장사가 제일이라고 지껄이고 있다.

회색 외투를 좀 퇴폐적으로 어깨에 걸친 여자는 등골에 채찍을 느끼는 듯 흠칫 외투를 치켜올리면서 창밖을 보고는 연신 담배만 피고 있다.( 자신에게 쏠리는 많은 눈초리와 험한 말에 그녀의 심장은 크게 상했을 것이다.)

모인 사람들은 또 떠들어 댄다. 여자는 안중에 없다. 벌어먹는 꼴이 제각각 이라거나 생긴대로 벌어 먹는다거나 척 보면 안다거나 갈보 타령에 웃고 떠든다. 변소에 다녀온 사내는 (여자를 데리고) 만주 대련 북진 등 안 다녀 본 곳이 없다고 호탕하게 웃는다.

▲ 기차에 탄 사람들은 한 여자를 집단 린치한다. 언어 폭력이 장난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여자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여자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을 한다. 그녀의 내공은 거의 신들린듯 하다.
▲ 기차에 탄 사람들은 한 여자를 집단 린치한다. 언어 폭력이 장난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여자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여자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을 한다. 그녀의 내공은 거의 신들린듯 하다.

포주 남자는 시시껄렁한 소리를 지껄이다가 고량주를 연신 먹고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한 잔씩 권한다. 먼저 권했다기보다는 곰방대 노인이 한 잔 달라고 하면서 돌려먹게 된 것이다.

술을 먹으면서 사람들은 여자에게 대한 동정이나 이해보다는 질타하고 험담하고 행실의 나쁨을 노골적으로 까발긴다. 아무리 공짜 술을 얻어먹기로 서니 여자 편을 들지는 못할망정 그녀의 아픈 마음에 비수를 꽂고 있다.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해대는데 듣고 있는 여자의 심정은 어땠을까. (용서 받지 못할 죄.)

사내는 신세타령이다. 돈벌이로 그만한 것이 없다고는 하지만 에미나이들의 성화가 대단한데 한 이삼십명 거느리고 있으면 별에 별 꼴 다 본다는 것.

그 힘든 일 가운데 하나는 데리고 있던 여자들이 자주 도망가는 것이다. 이 화상만 해도 찾느라고 자식놈들은 만주 벌판을 뒤지고 나도 여기서 또 돈 쓰고 애먹을 걸 생각하면 거저 쥑여도 싸다는 듯이 목소리르 높인다.

분노한 그가 갑자기 주먹을 번쩍 처들어 한 대 갈길 듯 하더니 그러지 않고 슬그머니 내려 놓자 사람들은 모두 웃기에 바쁘다. ( 관찰자인 나는 여기서 이런 웃음들이 그 여인의 혼을 학대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가운데 기차는 다음 역에 도착하고 실수한 젊은이와 곰방대 노인이 내리고 다른 손님은 타고 어수선하다. 아직 내리지 않은 당꼬바지는 여자가 술을 따라 주면 좋겠다는 등 그 와중에도 여자에게 수작이다.

함부로 해도 된다는 그의 주장에 다른 사람이 정든 사람과 같이 살려고 도망갔다가 잡혀 왔는데 무슨 기분으로 술을 따르겠느냐고 핀잔을 준다. 그렇다면 혀를 깨물고 죽어야지 왜 따라 나섰느냐는 대꾸가 따른다. 이어 깨끗한 계집이니 갈보니 하고 입에 나오는대로 지껄일 때 포주 신사가 차창 밖으로 달려온 누군가에게 연신 따귀를 갈기도 있다. 그러면서 몇 마디 주고받는데 일이 잘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는 표정이다.

얻어맞은 자는 포주 아들로 아버지와 함께 동업하는데 아버지가 도망간 여자를 쫓아간 사이 다른 여자도 도망을 가서 이번에는 아들이 쫓아 나선 것이다. 아들도 아버지처럼 달아난 창녀를 찾았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여자를 인수인계하고 다음 역에서 내렸다. 기차에 올라온 아들은 여자와 눈이 마주 치자 아무런 말도 없이 다짜고짜 뺨을 세 번이나 올려 붙였다. 여자의 볼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났고 경련이 일었다.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의아해 했다.

여자의 볼에서는 눈물 같은 것은 흘러내리지 않았으나 슬픔과 분노와 억울한 것은 것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여자는 좌석에서 일어났다.

나는 필시 그녀가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릴 것 같아 불안했다. 아니면 숨겨둔 은장도로 몸의 급소를 찌를지도 모른다. 입술을 악물고도 웃어 보이던 그 눈. 변기 속에 머리를 처박고 입에서 선지피를 철철 흘리는 그 여자의 환상. 언제 비명이 들릴지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그런데 잠시 후 돌아온 여자는 이미 평정심을 찾고 있다. 얼굴에는 어느새 분칠을 새로 해 맞은 자국을 감추고 있다. 자리에 앉은 여자는 태연하다.

옥주 년도 잡혔어요? 여자는 아들과 이런 농담을 주고받고 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나는 여자가 자살하지 않은 것에 안도했으나 저런 생명력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지 껄껄 웃어나고 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 장삼이사는 보통 사람들을 가리킨다. 기차 안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장삼이사들이다. 그들은 어떤 거창한 목표나 이상보다는 하루 먹고 사는데 바쁘다.

그 와중에 나라는 인물은 그들과는 달리 조금 배운 사람이다. 인물들의 언행을 꿰뚫어 보고 나름대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도 내린다.

그러나 그들과 대화를 함께 하거나 사건에 끼어들지 않는다. 오로지 방관자 역할에 그친다. 여자가 죽으러 갈 것 같다는 확신이 들면서도 이를 방지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맞는 여자를 보고도 도와주지 않고 남들이 한꺼번에 대들어 왕따를 시켜도 그저 듣고만 있을 뿐 모른 척하고 있다. 때릴 이유가 있어 때리고 맞을 처지니 맞는 것뿐이라는 생각이다.

비열한 지식인의 한 전형이다. 나라를 뺏긴 척박한 시대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정의라는 것이 있다면 한마디 하고도 남을 텐데 그는 작품이 끝날 때까지 영원히 방관자로 남고 있다. 이것이 작가가 노린 것이라고 해도 관찰하는 나의 왜소함은 가실 수 없다.

최명익은 1936년 ‘조광’에 <비오는 길>을 발표해 작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섬세한 인간 군상들의 심리묘사가 일품이어서 이상과 함께 심리 소설의 대가로 인정받았다.

식민지 시대의 무기력증, 절망, 소외, 인간 본성의 비열함 등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47년에는 을유문화사에서 <장삼이사>라는 단편집을 내놓았다. 이후 북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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