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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29 18:51 (금)
103. <오발탄>(1959)- 불행한 역사 잘못된 과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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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오발탄>(1959)- 불행한 역사 잘못된 과녁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0.03.02 0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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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식 표현을 빌리면 행복한 가정은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족은 각기 그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계리사 사무실에 근무하는 철호의 가족을 예로 들어보자. 그에게는 노모가 있다.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데 가자, 가자는 말만 되풀이한다. 동생 영호는 군대를 제대한 지 2년이 지났으나 놀고먹고 있다. 여동생 명숙은 양공주다.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팔고 있다.

아내는 만삭이다. 노랗게 뜬 얼굴의 다섯 살 난 딸은 그 나이 아이들처럼 세상 물정을 모른다.

철호의 월급이 넉넉하다면 문제는 어렵지 않게 풀릴 수 있다. 그런데 차비도 벌지 못해 10리 길을 걸어 다닌다. 종로 언저리에서 해방촌 언덕의 집에 오면 파김치다.

집구석은 더 가관이다. 그러니 서둘러 퇴근할 이유가 없다. 남들이 다 가고 사원 아이가 청소 질을 할 때쯤이면 겨우 일어선다.

어제와 같은 오늘과 오늘과 같은 내일은 철호에게 죽을 맛이다. 도무지 희망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영호가 제 몫을 해 주면 좋으련만 희망 사항일 뿐이다. 고학해 대학 3학년까지 마친 영호는 일자리 찾기보다는 한탕주의에 물들어 있다.

좀 부족해도 양심껏 살자고 달래 보아도 영호의 마음은 다른 데 있다. 그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노심초사하지만 달리 방도가 없다.

설상가상으로 아내의 산고가 심하다. 축하 분위기는 아예 없다. 태어난다고 해도 가난한 집의 아이는 짐일 뿐이다.

E대 음악과를 나온 아내는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앞날이 보였으나 지금은 몽유병 환자처럼 그냥 쭈그러져 있을 뿐이다. ( 작품에서 아내의 역할은 실로 미미하다. 겨우 삼촌 영호가 사준 딸아이의 꽃신을 놓고 나누는 대화가 전부다.)

이런 가족에게 시도 때도 없이 가자고만 외치는 해골 같이 비쩍 마른 어머니의 존재는 딱하다 못해 저주스럽다. 고향으로, 옛날로 돌아가자는데 그곳은 38선으로 막힌 지 오래다.

철호는 주먹이라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칵하고 어디 가서 자빠지고도 싶다. 그래도 죽을 때까지는 살아야 하는 것이 목숨이다. 더구나 집안을 챙겨야 하는 장남이 아니더냐.

어느 날 철호는 전차 안에서 미군 짚 차에 색안경을 쓰고 있는 명숙을 본다. 한 손을 운전대에 다른 한 손은 명숙의 허리를 안은 미군을 보고 전차 안의 사람들은 수군댄다. 장사치곤 고급이지 밑천 없이 혹은 저것도 시집을 갈까.

폭발하기 직전의 철호. 그러거나 말거나 명숙은 시도 때도 없이 풍속 단속에 걸려 철호를 경찰서로 불러들인다. 달리 오빠 말고 보호자가 없기 때문이다.

경찰서를 나온 둘은 어느 지점에서 서로 눈인사조차 없이 각기 갈 길을 간다.( <오발탄>은 영화로도 제작됐다. 1961년에 나온 유현목 감독의 동명 영화는 원작만큼이나 작품성 또한 크게 인정받았다. 김진규가 분한 철호와 명숙 역의 문정숙이 도로를 사이에 두고 헤어지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멋있었다. 최무룡이 연기한 영호 역도 볼만하다. 시간을 내서 독자들은 위대한 한국영화로 기록되고 있는 <오발탄>을 찾아보기 바란다.)

심사가 좋을 리 없는 철호에게 영호라도 위안이 되면 오죽 좋겠는가. 그런데 앞서 이야기했듯이 영호는 한술 더 뜬다. 양심이고 법이고 다 때려치우고 나쁜 짓 생각만 하고 있다. 늘 술에 취해 있고 꼴에 화랑새 대신 빨간색 양담배를 빤다.

간혹 택시를 타고 오기도 한다. 돈 한 푼 벌지 못하는 주제에 이러니 철호가 보기에 영호는 한심해도 너무 한심하다. 둘은 섞이지 못하는 물과 기름처럼 살얼음판 같은 하루를 보낸다.

▲ 철호는 방향을 잃었다. 가자고 외치는 어머니가 있는 해방촌으로 가야할지, 아니면 아내가 산고로 죽은 병원으로 가야할지 그도 아니면 강도질로 경찰서에 잡혀 있는 동생 영호를 만나러 가야 할지 갈팡질팡이다.
▲ 철호는 방향을 잃었다. 가자고 외치는 어머니가 있는 해방촌으로 가야할지, 아니면 아내가 산고로 죽은 병원으로 가야할지 그도 아니면 강도질로 경찰서에 잡혀 있는 동생 영호를 만나러 가야 할지 갈팡질팡이다.

그러던 또 어느 날 영호가 드디어 사고를 쳤다. 까마귀만 한 용기로 권총 강도를 하다 잡힌 것이다. 근사한 양옥도 이천만환 짜리 세단도 물 건너갔다. 우리도 한 번 살아보자던 야무진 꿈은 보기 좋게 박살 났다.

이번에도 철호가 보호자로 그를 면회한다. 영호는 말한다. 인정선에 걸렸다. 법률선은 무난히 뛰어넘었는데. 쏘아 버렸어야 하는 건데. 그는 반성 대신 자신의 나약함을 비웃는다. ( 그 당시 사회 분위기를 알 만하다.)

다시 집이다. 명숙이 철호에게 한마디 한다. 병원에 가보라고. 언니가 애를 낳기 위해 병원에 갔는데 지금쯤 애를 낳았거나 죽었을지 모른다고.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지기 마련이다. 철호가 도착했을 때 간호사는 아내의 죽음을 알리고 그 말을 듣는 철호는 그 말을 했던 간호사보다도 더 침착하다.

흰 저고리, 까만 치마를 입고 무대 위에서 노래 부르던 꿈 많던 E대학생 아내는 지금 사라지고 없다. 병원 밖으로 나온 그는 걷는다. 마냥 걷는다. 어디로 가겠다는 생각도 없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병원 앞이고 경찰서다. 그러다 치과의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명숙이 준 돈으로 이빨을 뽑는다. 두 군데 치과를 들러 아쁜 이를 죄다 뽑았다. 휘청, 빈혈이 그의 온몸을 파고든다.

그러나 머리는 그지없이 맑다. 침을 뱉으면 피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나 아랑곳하지 않는다. 두 끼를 굶은 철호는 곧 쓰러질 듯 위태롭다.

그때 택시가 마침 오고 그는 택시를 타고 집이 있는 해방촌으로 아내가 죽은 병원으로 철호가 갇힌 경찰서로 가자고 횡설수설이다. 어디로 갈지 방향을 잡지 못하는 그를 보고 운전사는 어쩌다 오발탄 같은 손님이 탔다고 두런거린다.

: 어머니가 가자고 외치는 곳은 고향이다. 고향은 북한이다. 월남 한 후 어머니는 하늘이 알아 주는 부자는 아니어도 그럭저럭 잘살았던 고향 생각밖에 없다. 정신이 들어도 정신이 나가도 가자, 가자고 소리를 외친다. 할 줄 아는 말은 그것뿐이다.

자다가도, 깨어나서도 시도 때도 없이 부르는 가자 소리에 식구들은 따라 미칠 지경이다.

전쟁 후 가난에 빠진 갈 곳 잃은 실향민 가족을 배경으로 한 이범선의 <오발탄>은 전후 한국문학 가운데 단연 백미로 꼽힌다.

각기 개성이 뚜렷한 가족이 벌이는 각자도생은 참혹한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계절은 아마 지금쯤일 것이다. 입춘도 지나고 우수가 왔으나 아직 완전한 봄은 아닌 겨울 끝자락에서 잘 못 발사된 오발탄.

철호는 내내 괴롭히는 이빨을 뺀 것으로 지리리 궁상을 탈출했을까.

양심은 손끝의 가시, 윤리는 나이롱 빤스, 관습은 소녀 머리 위에 달린 리본, 법률은 허수아비라는 영호의 주장은 같잖아도 긴 여운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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