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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29 00:50 (금)
102. <젊은 느티나무>(1960)- 비누냄새와 다른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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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젊은 느티나무>(1960)- 비누냄새와 다른 피
  • 의약뉴스 이병구 기자
  • 승인 2020.02.23 20: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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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에서 비누 냄새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나오는 냄새와는 사뭇 다르다. 빈부격차나 계급 혹은 불평등과는 하등에 상관이 없다. 포만감 혹은 안락 나아가 성적인 것까지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 앞선 냄새와 뒤선 냄새는 도저히 섞일 수 없다.

각설하고 강신재의 단편 <젊은 느티나무>는 비누 냄새로 첫 문장을 열고 있다. 여기서 그는 오빠다. 오빠에게 그 라고 표현한 것은 오빠를 오빠로 여기지 않고 남자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빠가 아닌 그의 눈 속에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친절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그는 교회 오빠 아닌 실제 오빠인데 진짜 오빠가 아닌 것은 혈연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주인공 숙희의 아버지는 죽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릴 적 네 아버지가 사변 후에 죽었다는 할머니의 한마디로 그렇게 됐다.

아버지는 죽었으나 어머니는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어머니는 젊고 예쁘다. 어느 날 므슈 리(불란서 식 이름이나 한국인이다.)가 숙희가 사는 시골 과수원으로 찾아온다. 한 번이 아니고 두 번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한숨을 몇 번 쉰 후 므슈 리를 따라 서울로 갔다.

므슈 리는 좀 뚱뚱하다. 직업은 대학의 경제학 교수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는 생활이 안정되자 숙희를 데려온다.

그곳에는 앞서 말한 비누 냄새를 풍기는 오빠 현규가 있다. 의붓 아버지의 아들이다. 한집에서 사는 18살 여고생과 22살 물리학 전공의 대학생.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지 않은가.

잠시 여기서 숙희와 현규가 어떤 인물인지 강신재의 표현을 빌려 보자. 숙희는 미스 E여고로 뽑힐 만큼 대단한 미인에다 공부도 잘하는 재원이다. 현규는 문리대의 수재로 운동도 잘해 테니스 솜씨는 시골 코치보다 낫다. ( 둘 다 외모와 인품이 거의 완벽하다. 그러니 다른 상대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자꾸 보고 매일 만나다 보니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표주박의 물을 같이 나눠 마시는 사이다. 숲에서 손을 잡고 그의 품에 안긴 것은 그즈음이다.

숙희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몸속으로 파고드는 기쁨의 감각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 오누이니 오빠니 하는 단어는 혐오스러울 수밖에.

현규 친구가 잠깐 숙희에게 러브레터를 보내나 숙희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K 장관의 아들로 의과대학에 다니지만 관심 밖이다.

아무나 편지를 보라고 아무렇게나 놓는다. 어머니가 본다.( 이 대목에서 숙희에게 큰 아쉬움이 남는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의 러브레터 라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있어야 한다. 그가 숙희 말고 다른 사람이 보라고 쓴 편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예의 없는 숙희, 그래서 숙희는 완벽한 여자는 아니다. 앞서 완벽이라고 말한 대목은 취소해야 마땅하다.)

▲ ▲숙희는 잘못된 줄 알면서도 의붓오빠 현규를 사랑한다. 현규도 마찬가지다. 둘은 사랑이 비극이 하닌 희극이 될 것을 맹세하면서 현재가 아닌 미래에 기대를 걸고 있다. 작품밖에서 둘이 어떤 결말을 맺을지 상상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 ▲숙희는 잘못된 줄 알면서도 의붓오빠 현규를 사랑한다. 현규도 마찬가지다. 둘은 사랑이 비극이 하닌 희극이 될 것을 맹세하면서 현재가 아닌 미래에 기대를 걸고 있다. 작품밖에서 둘이 어떤 결말을 맺을지 상상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시간은 흐르고 흐른다. 숙희는 마음 놓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애달프다. 혈연관계가 없다손 치더라도 법적,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 걸릴 수 없다.

만약에 둘이 결혼한다고 치자. 그러면 숙희의 의붓아버지는 시아버지가 된다. 현규 역시 의붓어머니가 장모가 되는 셈이다. ( 이것은 마치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어머니와 결혼하는 아들의 이야기와 비견될까. 아니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둘은 혈연관계가 맞다. 그러니 그것은 비극이고 이것은 비극이 아닐지 모른다.)

숙희는 학업도 포기하고 시골로 내려온다. 아빠가 있는 미국으로 곧 떠날 엄마에게 ‘엄마의 아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차마 엄마에게 할 수 없다. 그것이 설혹 인공적 모자 관계라고 해도 말이다.

현규가 따라온다. 숙희는 현규와 이 이상 진전에 공포를 느끼고 있다. 엄마, 아빠가 없는 곳에서 둘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

숙희의 선택은 현명한 것인가. 숙희를 따라 시골로 내려온 현규는 젊은 느티나무를 사이에 어떤 언약의 말을 남겼을까. 지금이 아닌 미래를 내다보자고 손가락 걸고 맹세 했을까. 숙희는 어땠을까.

뭐, 어떻게 되겠지, 미래는? 낙관적이었을까. 이것은 막연한 꿈이 아니다. 만약 둘이 사랑을 하면서 죄의식이 없다면 파멸도 없을 것이다. 파멸은 무언가 잘못을 인정할 때 오기 때문이다.

: 지금, 의붓 오누이의 사랑 이야기는 흔하다. 놀랄 일도 아니다. 막장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된 것은 지난 이야기다.

그러나 1960년 ‘사상계’에 <젊은 느티나무>가 발표될 때만 해도 신선한 사건이었다. 거기다 현규 친구까지 등장하는 삼각관계가 있으니 강신재는 시대를 조금 앞서간 작가임은 틀림없다.

오빠에게 따귀를 맞았을 때도 그것이 자신을 사랑한 질투라는 것을 알고 아픔보다는 기쁨으로 환호하는 숙희에 대한 심리 묘사는 기가 막히다. (여성이었기에 그런 표현이 가능했다면 과언일까.)

그녀는 이 소설을 발표하기 3년 전에 <표선생 수난기>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아들의 친구와 불륜에 빠진 어머니를 그려 당시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쉽게 읽힌다. 문장이 어렵지 않다. 문학적 완성도 보다는 소재의 참신성에 더 많은 점수를 주고 싶다. 근친상간이라는 입이 벌어지는 소재로 독자들의 주목을 한눈에 받았다.

그러나 그것을 육욕이 아닌 순수한 사랑으로 변모시켰다. 그런 수완을 가진 작가는 치명적인 사랑이 얼마나 애절한지 보여 주는데 성공했다.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냉장고, 코카콜라, 크렉카, 치이즈, 부엌 사람, 테니스, 자색 양탄자, 육중한 가구, 기가 막히게 비싼 시계 등이 묘사돼 상류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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